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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모의 클레오 파트라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종종 그녀의 미모가 가장 먼저 언급됩니다.
그녀의 코가 조금만 더 낮았다면 역사가 바꼈다는 말이 있을 정도죠.
하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단순한 외모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녀의 지혜, 언변, 그리고 문화적 소양으로 유명했습니다.
여러 언어에 능통했던 그녀는 외교와 정치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매력은 당대 가장 강력한 두 로마 지도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사로잡았습니다.
오늘은 그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뤄보겠습니다. 
 

카이사르와의 사랑 

 
 
 

기원전 48년,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왕위를 둘러싼 내전 중에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카이사르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에게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 카펫에 몸을 감추어 그의 개인 숙소로 몰래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 대담하고 기발한 입장은 카이사르를 매료시켰고, 두 사람 사이의 로맨스가 시작되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지지를 얻어 왕위를 되찾았고, 둘 사이의 관계는 정치적 동맹을 넘어서 강렬한 개인적 연결로 발전했습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매력과 지성에 매혹되었으며,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권력과 영향력을 활용하여 자신의 위치를 강화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방문은 로마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녀는 카이사르의 정식 초청으로 로마에 머물며, 그녀의 존재는 로마 사회에서 논란과 매력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에서 럭셔리하고 화려한 생활을 했으며, 그녀의 이국적인 매력과 카리스마는 많은 로마인들을 매료시켰습니다. 그녀는 당시 로마의 중심인 포럼 근처에 자신만의 화려한 궁전을 마련했고, 이는 로마 사회에서 상당한 관심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랑의 결실 : 카이사리온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사이에는 아들 카이사리온이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는 클레오파트라에게는 정통성과 미래의 통치자로서의 상징이었으며, 카이사르에게는 개인적 애착과 정치적 복잡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카이사리온의 탄생은 두 사람의 연결을 더욱 깊게 하고, 클레오파트라의 지위를 강화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카이사르와의 사랑의 끝

 

이들의 로맨스는 카이사르의 비극적인 암살로 갑작스럽게 종결되었습니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클레오파트라에게 큰 충격과 변화를 가져왔으며, 그녀의 정치적 전략과 미래 계획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새로운 정치적 환경에 적응하고 새로운 동맹을 모색해야 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의 로맨스는 고대 세계의 정치적 권모술수, 열정적인 사랑, 그리고 비극적인 결말을 담고 있는 이야기로,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끌고 있으며, 고대 역사의 가장 매력적인 장면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안토니우스와의 사랑 

카이사르의 죽음 후 로마는 옥타비아누스(후에 아우구스투스로 알려짐),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로 구성된 삼두정치 체제로 재편성되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첫 만남은 정치적 필요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기원전 41년, 안토니우스는 동부 지역을 담당하게 되면서 이집트와의 관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고,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와의 동맹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관계는 처음에는 정치적 동맹으로 시작되었지만, 곧 열정적인 로맨스로 발전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매료되었고, 이집트와 로마 사이의 권력 균형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둘 사이의 관계는 고대 세계의 정치적 지형을 변화시켰습니다.

 

 

악티움 전투 : 비극적 결말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관계는 결국 악티움 전투로 이어졌습니다. 이 전투는 로마 내전의 결정적인 순간으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와 맞붙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 전투에서 안토니우스를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해군을 투입했습니다. 하지만, 악티움 해전에서의 패배는 두 사람의 운명을 비극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악티움 해전 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도망쳤으며, 그곳에서 둘은 자신들의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잘못된 정보에 의해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고 믿고 자살했으며,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죽음 후 독사에 물려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이러한 비극적인 결말은 고대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사랑 이야기 중 하나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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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제임스 사이디스의 삶은 역사상 가장 높은 아이큐를 가졌다고 알려진 천재의 파란만장한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의 아이큐가 160으로 보고있는데 그는 최소 250에서 300까지의 아이큐를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죠. 

윌리엄 제임스 사이디스( William James Sidis)

하지만 실제로 그가 학문적이나 과학적으로 기여한 것은 없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던 것일까요?? 

 

사이디스의 인생 

출생과 조기 교육

1898년 뉴욕에서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사이디스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지능을 보였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의 재능을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이미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하는 등의 비범한 능력을 보였습니다.

 

하버드 입학과 경험

사이디스는 불과 9세에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지만, 실제로 출석한 것은 11세 때였습니다. 이러한 조기 입학은 당시 언론의 큰 관심을 받았으며, 어린 나이에 이룬 이러한 성취는 공과 사 모두에서 그에게 큰 부담을 주었습니다. 하버드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많은 정신적 압박을 가져왔고, 이는 그의 나머지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불행했던 사이디스의 청년시기

대학 졸업 후, 사이디스는 전통적인 학문적 경로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길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사회주의적이고 반전적인 활동에 참여했으며,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1919년 보스턴에서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이 경험은 그의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그 후 그는 공공연한 활동을 피하고 은둔 생활을 선택하게 됩니다.

 은둔 생활을 하며 알바를 하며 지내지만 파파라치들이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이디스는 파파라치들을 고소했지만 판사는 사이디스를 사실상 공인으로 판결하여 패소하게 됩니다.

 

공무원으로의 새 출발

 이후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며 낮은 점수로 합격합니다. 충분히 고득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세간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일부로 낮은 점수를 받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학문적 경력을 포기한 사이디스는 보스턴 지역에서 다양한 사무직, 특히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조용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활용하지 않았으며, 독서와 개인적 연구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그의 글쓰기와 연구는 전문적인 학문계에서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의 지적 깊이와 독창성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이디스의 마지막

 사이디스는 1944년에 공무원일을 하다 뇌출혈로 사망하며
역사상 최고의 천재였지만 그 누구보다 불행했던 사이디스의 안타까운 인생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사이디스의 이야기는 높은 지능이 반드시 행복이나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천재성과 정서적 안정, 사회적 적응 사이의 긴장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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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많은 예언자가 존재합니다.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유명한 것에 비해 적중률은 높지 않습니다.
게다가 애매모호한 예언으로 끼워맞출 여지가 존재하는 예언들이 많죠

하지만 일본의 타츠키 료는 조금 다릅니다. 

타츠키 료


그녀는 예언한 15가지 중 13가지가 현실로 드러났습니다.

 

적중한 그녀의 예언들

1.프레디 머큐리의 죽음

1976년 11월 24일 타츠키 료는 꿈에서 친구와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송에서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질병으로 죽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15년이 흘러 1991년 11월 24일 프레디 머큐리는 에이즈에 걸려 죽었습니다. 

 

2.오자키 유타카의 죽음

1982년 4월 25일 그녀는 또 한 명의 연예인 오자키 유타카가 죽는 예지몽을 꾸게 됩니다. 

오자키 유타카


그리고 이역시 10년 뒤 천재 싱어송라이터로 불리던 '오자키 유타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26살 나이로 죽습니다. 

3. 다이애나의 죽음

1992년 8월 31일 꿈에서 다이애나라는 문자를 보았고 5년 후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는 교통사고로 죽게됩니다.

다이애나의 교통사고 사진

 

4. 고베 대지진

1995년 1월 2일  꿈에서 땅들이 마구 갈라지는 장면을 목격하고 깨어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15일 후인 1995년 1월 17일, 일본은 "고베 대지진"이 덮쳐서 6천여 명이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5. 코로나 바이러스 예언 

꿈에서 미지의 바이러스가 2020년 나타나 4월 정점을 찍고 10년 후 다시나타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실제로 2019년 12월 코로나가 발생했고 2020년 일본으로 도달해 2020년 4월에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했습니다.

 

이처럼 비교적 구체적인 일시와 내용을 예언을 했는데요. 그래서 그녀가 발간한 '내가 본 미래' 라는 책은

타츠키 료의 책 ' 내가 본 미래 '

발간 당시 인기가 없었지만 지금은 엄청난 인기로 현재 구하려면 100만원이 넘는 가격을 지불해야 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녀의 예언 중에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예언들도 있습니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래들

1. 미래의 바이러스

앞서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 10년 뒤에 나타난 다는 바이러스가 있습니다.

 

2. 후지산 대폭발

그녀는 꿈에서 후지산이 크게 분화화는 꿈을 꿨는데 이역시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3. 가나가와 현 쓰나미

꿈에서 가나가와 현에 엄청난 쓰나미가덮치는 꿈을 꾸었는데 이 역시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타츠키 료의 근황

2000년 이후 만화가에서 완전히 은퇴하고, 요코하마 근처에 살며 복지 관련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타츠키 료의 근황입니다.
 그 후로도 예지몽은 계속된다고 하는데 공식적인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2021년 출판사와
 연락되어 과거 작품에 해설을 더한 《내가 본 미래 완전판》을 냈습니다. 

 

지금까지의 적중률을 보면 상당히 신뢰성이 있는데 과연 남은 예언들도 현실로 나타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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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마 그레제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악명 높은 여성 전범입니다. 그녀의 외모는 여간부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고 금발을 가지고 있어 금발의 천사라고도 불렸으나 하는 행동은 잔인한 나치 그 자체였습니다. 

이르마 그레제

이르마 그레제의 불우한 가정

이르마 그레제는 1923년 10월 7일, 낙농업자 부모 밑에서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이르마의 유년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936년 이르마가 13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동네 술집 주인의 딸과 바람을 피웠습니다. 이 불륜을 이르마의 어머니가 알아차리고 충격을 이기지 못해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을 하게 됩니다.

바람까지는 그렇다 쳐도 진짜 비극은 이름하여 어머니가 불륜을 알고 나서 독극물을 마시고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이때부터 이르마의 정서는 급격하게 불안해졌고 학교 생활에도 적응하기 힘들어 해서 친구들로 부터 왕따를 당했습니다. 왕따가 점점 심해져 이르마는 견디지 못하고 1938년 15세가 되던 해 학교를 자퇴하게 됩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가정도 크게 부유하지 않았던 이르마는 돈을 벌기 위해 농장이나 상점에서 일을 시작하고 간호사가 되고 싶어하던 이르마는 틈틈히 의학 공부를 했습니다. 

 나치에 발을 들인 이르마 그레제

 그 당시 이르마는 히틀러를 존경했고 나치당이 하는 일을 같이 하고 싶어

이름 하도 히틀러를 대세를 따랐습니다. 나치당이 하는 일을 하고 싶어 슈츠스타펠 SS라는 나치의 부대에 들어가 간호 보조로 일을 하게 됩니다.

당시 이르마를 상징했던 건 가죽 채찍이었습니다. 이르마는 가죽 채찍과 부츠로 지나가다가 마음에 안 들면 유대인 수감자들을 때리고 짓밟으며 군견에게 물라고 시키거나 권총으로 쏴죽였습니다. 그리고 가스실에 보낼 인원도 하나하나 골랐죠.

 이르마는 천직을 찾은 듯 잔혹하게 일을 했고 말도 안 되는 승진을 하게 됩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녀는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 C캠프의 여간수 장에 임명됩니다. 당시 여간수 중에서 서열 2위였는데 학력도 백도 없이 이르마는 순수 실력으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여성들에게 특히 잔혹했던 이르마 

이름 아는 특히 여성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심한 짓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매력적이고 예쁜 여성들은 가스실로 보내버리거나 채찍으로 때리며 쾌락을 느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적 관계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수감되었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르마는 죄수를 살릴지 죽일지 선택할 때 여성 죄수들의 옷을 벗게 한 뒤 싸움을 붙였다고 합니다. 또한 감옥에 있던 예쁜 어린 아이가 철조망을 통해 배관공과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아이의 얼굴을 채찍으로 내리쳐 아이의 한쪽 눈을 실명시켰다고 합니다.

 

이르마의 최후

나치가 전쟁에서 패하게 되고 이르마는 4월 17일 요제프 크라머 등 다른 간부들과 함께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12월 13일에 베르겐 벤젤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영국군들은 이르마의 어른 외모로 포로인 줄 알았고 이를 이용해 이르마도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동료의 증언과 수감되었던 유대인들의 증언으로 유죄가 확정되어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장의 이르마 그레제

 그녀는 1945년 12월 13일 22세가 되던 해에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자신의 죽음은 두려웠는지 최대한 빨리 죽여달라고 말했지만 사형 과정 중 문제가 생겨 아주 고통스럽고 천천히 죽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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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코벳의 어린 시절 

1875년 인도에서 태어난 짐 코벳은 어려서부터 사냥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습니다.

9살 때 부터 엽총으로 표범을 잡으며 열한 명의 형제 자매 중에서도 사냥 실력과 센스가 월등히 높았고 전문적인 사냥꾼들마저 어린 코벳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숲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연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키운 코벳은 학생의 나이에 접어든 이후 더 이상 무의미한 사냥은 하지 않고 여행을 다니며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18세에 학교를 그만둔 뒤 철도에 연료 검사관으로 일을 하다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군에서 그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보병 장교까지 진급하게 됩니다.

짐 코벳

공포의 식인 호랑이 참파와트의 등장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07년 인도 정부로 부터 코벳 앞으로 공문이 한 통 도착합니다. 

공문의 내용은 쿠마온 지역 인근에 출몰한 한 마리의 호랑이로 인해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고 정부 측이 사냥꾼을 물색하던 중 코벳에 대한 소문을 전해 듣고 그에게 도움을 요청이었습니다.

'참파와트 호랑이'라고 이름 붙은 이 맹수에게 희생당한 사람은 대부분 여성과 어린 아이들이었는데 그 수가 무려 436 명이었습니다. 정부는 한 마리의 호랑이를 잡기 위해 군대까지 동원하였지만 참파와트는 이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추적을 피해가며 마을 주민들을 끊임없이 습격했습니다.

이후 정부는 최고의 정예 부대라고 불리는 구르카 용병단까지 파견했지만 이 마저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또한 동네 사람들이 지역의 모든 호랑이와 짐승들을 죽이고 정작 문제의 식인 호랑이는 잡지 못한체 피해가 계속 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참파와트 호랑이

원래 다시는 동물을 사냥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한 그였지만 이 호랑이 때문에 사람과 동물 모두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직접 호랑이를 사냥하기로 결심합니다. 

 

사냥 시작

코벳은 사냥을 시작하기 전 정부에게 한 가지 사항을 요청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부가 이 호랑이에게 걸린 어마어마한 현상금들을 모두 취소시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막대한 현상금은 어리숙한 사냥꾼들을 불러들였기 때문에 되려 호랑이에게 사냥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추적을 하는데 있어서도 방해 요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정부는 곧바로 요청을 수락하였습니다.

조사를 시작한 코벳은 발자국과 특징들로 해당 맹수가 8피트 정도(2m 40cm 정도) 크기의 뱅골 호랑이라는 것과 암컷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큰 크기가 아닌 이 호랑이는 피지컬이 아닌 지능적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사냥했다는 뜻이었고 전설의 사냥꾼인 코벳 역시 추적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흔적의 실마리가 보일 것 같으면 사라져 버리고 닿을 것 같다가도 어느새 멀어져 버렸습니다. 이유를 고심하던 코벳은 참파와트가 쇠 냄새에 유독 민감하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참파와트는 쇠 냄새를 맡기만 하면 해당 산에서 아예 자취를 감추고 다른 곳에 다시 나타나 주민들을 습격하는 행태를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참파와트의 약점과 묘수

코벳은 참파와트의 이 사냥 습성을 이용한 하나의 묘수를 떠올립니다.

마을 사람들을 대거 동원하여 농기구를 들고 산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와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럼 쇠 냄새를 맡은 호랑이는 그것을 피해 산 아래로 내려올 것이고 이때 코벳이 호랑이를 저격하는 작전이었습니다.

작전은 실행되었고 코벳의 예상대로 아직 인근 산에 머물고 있던 참파 아트는 산 아래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코벳은 덤불 속에서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산을 내려온 참파와트는 그대로 코벳의 총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이것이 코벳의 첫 식인 맹수 사냥이었습니다.

 

이는 짐 코벳의 수많은 사냥 중 제일 유명한 일화이며 사람을 가장 많이 잡아먹은 동물 1위로 기네스에 랭크되어 있기도 합니다

 

참파와트를 뛰어넘는 숙적과의 조우 

가장 유명한 스토리는 참파와트 호랑이 이지만 코벳이 진정으로 숙적으로 느꼈던 맹수는 달랐습니다. 

바로 수컷 뱅골 호랑이였던 독신자였습니다. 독신자의 별명은 그가 10년동안 짝이 없이 사람들을 사냥해서 그런 별명이 지어졌는데 인도의 우타르프라데시 주에서 1920년 1930년까지 1년 동안 활동하며 200 이상의 사람을 포식하였습니다.

이에 정부는 독신자가 주로 활동하던 일대의 숲을 모조리 벌목해 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터전을 잃은 호랑이는 살던 곳을 떠나 새 보금자리에 정착하였는데 그곳은 다름 아닌 짐 코벳이 살던 집 근처의 숲이었습니다. 

 

1930년 겨울 산책을 하던 코벳은 이제껏 자신이 본 어떠한 호랑이보다 큰 호랑이 발자국을 발견합니다. 

발자국으로 추측되는 호랑이의 크기는 무려 3미터가 넘었습니다. 코벳은 곧바로 총을 꺼내들고 경계태세를 취했으나 근거리에서 거대한 호랑이를 마주치기에는 부담이 있어 서둘러 집으로 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코벳은 집 근처 호수로 나가 흡연을 하던 중 독신자와 처음 마주치게 됩니다.

 이를 두고 코벳은 "호랑이는 덤불 속에서 느리게 걸어 나오더니 나에게 두 눈을 고정시킨 채 호수에서 목을 축이고 돌아갔다. 그것은 내가 살면서 본 어떠한 광경보다도 공정하고 아름다웠다. " 라고 합니다.

 

 참파와트 호랑이가 늙고 병든 영악한 호랑이였다면 파월과 호랑이는 지능과 더불어 크기마저 거대한 말 그대로 괴수였습니다. 코벳은 이 악명높은 호랑이를 꼭 잡을 것을 다시 다짐하고는 호랑이를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독신자 사냥 

추적 중 코벳은 독신자의 울음소리로 추측되는 포효를 듣게 됩니다. 그는 소리에 민감한 호랑이를 유인하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가 호랑이 울음소리를 흉내내 유인에 성공하게 되는데 코벳의 계산에는 그가 30초쯤 후에 도착할 것이라 예상 자세를 잡은 뒤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독신자는 코벳이 숫자를 8까지 세웠을 때 이미 10미터 앞의 덤불까지 접근하여 거대한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코벳은 숨을 죽이고 천천히 총구를 돌려 독신자의 머리를 겨냥했습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 독신자의 위험에 기가 눌려버린 코벳은 명포수답지 않은 실수를 해버렸고 조준하던 머리의 정 중앙이 아닌 오른쪽 눈 아래를 맞춥니다.

그리고 총이 맞은 독신자는 숲이 떠나가라 포요하며 공중으로 펄쩍 뛰어오르더니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주위 10m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나무를 찢어버리는 독신자의 분노에 완전히 공포에 질려버린 코벳은 그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가만히 엎드린 상태로 독신자가 난동을 멈출 때까지 30분을 숨죽인 채 공포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총을 장전하는 소리마저 낼 수 없어 한 자세로 가만히 들고 있느라 팔에 경련까지 일어났습니다.

독신자가 몸부림을 멈추자 코벳은 엎드린 상태로 천천히 뒤로 빠졌고 거리를 충분히 벌린 뒤에 일어나 집까지 전속력으로 달렸습니다. 독신자가 코벳을 추격하지 않은 덕에 그는 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준비를 마친 후 다시 숲으로 향했습니다.

 코벳은 큰 상처를 입은 독신자가 멀리 이동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하였고 근처 개울에 잠복합니다. 사냥을 할 여력이 되지 않으면 목이라도 추기러 올 것이라고 추측한 것인데 얼마가지 않아 호랑이 한마리가 피를 흘리며 다가왔습니다.

코벳이 독신자를 발견했을 때 거대한 수컷 호랑이는 이미 뛰어들 자세를 취하고 코벳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코벳은 저번처럼 자칫 망설이기라도 하면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고 10년 넘게 지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파월가의 독신자는 그렇게 최후를 맞이합니다. 

파월가의 독신자를 사냥 성공한 코벳

 

전설의 마침표

 이 후로도 식인 맹수 사냥을 이어가던 코벳은 동물들의 살 곳이나 먹을거리 등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러한 사태가 끊임없이 발생할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인도 정부 측에 요청하여 야생 동물들이 터전으로 삼을 수 있는 국립공원 건립을 제안하였습니다.

당시에는 동물 보호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잡기 전이었으며 야생동물 보호를 위한 국립공원은 생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식인 맹수들을 사냥하며 국민적인 영웅으로 추앙받던 그의 인도 정부 측도 코벳의 요청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수락하여 공원은 그의 이름을 따 코벳 공원이 되었습니다. 

 

 짐 코벳은 63세 때 사냥한 식인 호랑이를 마지막으로 일생을 바친 포수직을 은퇴합니다.

그 후 케냐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자신의 여섯 번째 자서전 지필을 마치고 1955년 4월 19일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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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 능력을 얻은 바바 반가

 

바바 반가는 1911년 10월 오스만 제국 살로니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본명은 반겔리야 판데바 구슈테로바로 발칸반도의 노스트라다무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바 반가는 열두 살 무렵 강력한 폭풍에 휩쓸리는 사고를 당한 후 시력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시력대신 미래를 보는 힘을 이 사고 이후에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바 반가의 예언들

 

그녀가 생전 남긴 수많은 예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89 년의 예언입니다.

미국 형제들이 철로 만들어진 세계의 공격 당해 무너질 것이다.

수풀 안에서 늑대들이 울부짖고 무고한 피가 분출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 예언에서 이야기하는 미국 형제들이 붕괴 이전에 세계 무역센터를 의미하는 것이며 철로 만들어진 새는 빌딩과 충돌을 일으킨 보잉 767기를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수풀 안에서 중 수풀은 영어로 읽었을 때 부시라고 발음되는데 이것이 당시 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추측을 덧붙였습니다.

 

이 외에도 그녀가 맞춘 예언들은 많습니다.

 

1996년 자신이 8/11일에 장례를 준비할 것이라고 예언을 했는데 실제로 그 날에 85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2000년 8월에는 쿠르스크가 물 속에 가라앉고 전세계가 이에 애도할 것이다.

2004년에는 추운 곳이 따뜻해질 것이고 화산이 일어난다. 거대한 파도가 밭을 덮칠 것이고 사람과 마을 모든 것들이 물 아래로 잠길 것이다, 이는 2004년 남아시아 대지진을 예언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44대 미국 대통령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실제로 2009년 버락 오바마가 미국 4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그의 아버지는 케냐인입니다.

2020년에는 미국 대통령이 미스터리한 병에 걸릴것이다 예언하였는데 이는 도널드 트럼프의 코로나 19확진을 예언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022년 사람들이 새로운 바이러스에 익숙해질 것이다. 이는 정말 우리가 코로나에 익숙해 진것을 보면 이것도 역시 이루어 진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예언들

 

바바 반가는 무려 5079년 까지 예언을 하였는데 그 중 몇가지를 보면

 

2023년 - 강대국들이 앞다투어 대량 살상이 가능한 생화학 무기를 연구할 것이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만큼이나 심각한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가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이 더이상 출산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2341년: 뭔가 끔찍한 것이 우주로부터 지구에 접근했다.

 

3797년: 인공 태양 때문에 지구가 멸망한다. 인류는 다른 행성계에서 살아간다.

 

4599년: 인간은 불멸에 도달한다.

 

5078년: 인간이 우주 경계의 끝자락에 도달할 수가 있지만 인류 40%가 반대한다.

 

5079년: 전 우주가 멸망한다.

 

과연 바바 반가는 어떤 미래를 봤을 것인지 참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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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다머의 유년시절 

 

제프리 다머는 1960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제프리 다머의 어머니는 몸이 약하고 세균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그래서 갓난아기였던 제프리 다머를 사회로부터 철저히 격리시키고 본인 또한 기저귀를 갈 때 말고는 접촉하지 않았다. 

또한 아버지 또한 학업에 열중하느라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제프리 다머의 유년시절은 애정 결핍 그 자체이며 이러한 가정환경으로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제프리 다머의 취미

 당시 어머니와 아버지는 매일 같이 싸웠기 때문에 집 안에 있기를 싫어했다. 도피의 장소로 근처의 숲으로 도망 쳤는데

그러던 중 죽은 동물을 발견하게 되고 죽은 동물을 해부하는 취미가 생겼다. 

그리고 아버지를 통해 동물의 뼈를 보존하는 방법도 배웠는데 이를 통해 자신이 해부한 죽은 동물을 통해 표본을 만들기 시작했다. 

 

 

첫 번째 범행

 

 제프리 다머는 게이였는데 사춘기에 접어들자 남성과 성관계를 맺고 싶어졌다.

평소 해부를 즐겨했던 그는 살아있는 남성이 아니라 죽은 사람과 관계가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집 근처에서 조깅을 하던 남성을 목표로 삼은 뒤 수풀로 들어가 그를 죽이기 위해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나타나지 않아 첫 번째 살인 계획이 실패로 끝났다고 한다. 

 

 그 후 첫번째 범행은 1977년 부모님의 이혼 후 이루어졌다. 이후로 아버지는 집을 나가 모텔에서 거주하기 시작했고 동생과 어머니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 제프리 다머가 혼자 그 넓은 집에 살아가게 되었다.

 얼마 안 지나고 히치하이킹을 하던 남성에게 접근해 자신이 집까지 데려다 줄 테니 술 한 잔 하고 가라며 피해자를 자신의 집으로 유인한 뒤 아령으로 그를 살해해 시체를 해부하고는 남은 뼈를 망치로 박살내 근처 숲에 뿌렸다.

 

입대한 제프리 다머

 

 제프리 다머는 아버지의 권유로 대학에 입학을 했는데 각종 문제를 일으켜 3개월 만에 퇴학을 당했다.

이에 분노한 그의 아버지가 강제로 그를 육군에 입대시켰는데 군인이 된 후에도 매일 싸움을 일으켜 입대 2년만에 병역 부적합 판정을 받아 제대를 하게 되었다.

 그 시절 부대 인근에서 몇 번인가 살인 사건이 일어났었는데 당시 범인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훗날 이 또한 제프리 다머의 범행인 것 같다 라는 의혹이 있다. 

 

제대 이후 범행과 체포

 제대 이후 할머니의 집으로 들어가 말썽도 안 부리고 취직도 해 잠깐 평범한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자인 그는 만취한 상태로 난동을 부리고 유치장에 끌려가 벌금을 냈다.

이에 분노한 제프리의 할머니가 다머를 집 밖으로 내쫓았고 그래도 정신을 못차린 제프리 다머는 직장까지 해고당하며 백수가 되었다.

 쫓겨난 이 후 그는 아파트에서 혼자 살기 시작했다. 그 때도 살인을 멈추지 않았는데 시체를 냉장고에 넣어두었기 때문에 시체 썩은 냄새가 아파트에 퍼져 주민들과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지만 그럴 때마다 그가 냉장고가 고장 나서 음식이 상했다는 둥 핑계를 대서 그냥 넘어가 범행이 발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1년 라오스 출신의 피해자에게 접근해 사진 모델을 해주면 돈을 주겠다 라는 말로 글을 꼬셔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그 후 수면제를 타 잠을 재웠는데 잠깐 자리를 비울 때 피해자가 정신을 차리고 거리로 도망쳤다.

피를 흘리는 피해자를 본 사람들이 곧장 경찰에 신고를 해 경찰이 그를 찾아오게 되었지만 당시 제프리 다머가 경찰에게 그는 내 남자친구이고 술을 많이 마셨다. 술에 취해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해 그의 말을 믿은 경찰들이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아 제프리는 체포되지 않았다.  제프리 다머는 이 사건으로부터 2개월이 흐른 뒤에야 검거되었다.

 

살인자의 최후 

제프리 다머는 감옥에서 살해당했다.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자 평소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며 선처를 호소했지만

너무나 엽기적인 범행을 저질러서 재판부에서 선처 없이 937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이후 감방에서 기독교를 접해 매우 모범적인 생활을 보내고 있던 중 정신병을 앓고 있던 동료 제소자에 의해 철근에 후두부를 맞고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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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어린 시절

 

푸틴은 1952년 소련 시절에 태어났다.

당시 빈민가 아파트에서 생활을 하며 집안이 가난했던 탓에 매일같이 배고픔에 시달렸다.

이렇게 자란 푸틴은 청소년기에는 잦은 싸움에 휘말리고 동네 건달이 되었다.

 

하지만 이를 포기하지 않고  교육했던 부모님 덕분에 10대 후반 때 겨우 정신을 차리게 되어 이때부터 학업에 열중하며

유도 사범 자격을 따는 등 모범적인 학생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정치에 입문한 푸틴

 

 1991년 소련이 붕괴되게 되자 인맥을 통해 정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 때 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부시장을 맡았고 이 당시 러시아의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엘친의 눈에 띄어 대통령 행정실 총무실장 등 여러 요직을 맡아 근무를 한 끝에 1999년에 러시아의 총리로 발탁이 되었다. 

이후 2000에 러시아의 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그의 기나긴 독재가 시작되게 되었다.

2011년 러시아 총선 때는 부정 선거의 배후 인물로 거론되며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그도 그럴게 이 때 총선 득표율을 모두 합하니 146.47% 라는 말도 안되는 수치가 나와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았지만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후 치러진 대선에서 푸틴은 60%가 넘는 표를 획득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대선 또한 조작한게 아니냐고 의심을 품었지만 어찌 되었든 지금까지 대통령을 하고 있다.

 

푸틴과 관련된 죽음

 

 푸틴의 주변에는 의문스러운 죽음이 많았다. 

푸틴에 대해 폭로나 비판을 했던 자들은 대부분 총격을 받아 사망을 했고 혹여나 목숨을 건졌더라도 방사능이 들어간 차를 먹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등 이러한 사건이 수십 여 건이나 일어나는 바람에 방사능 공차라며 푸틴을 조롱하는 밈도 생겨나게 되었다.

 

 의문스러운 죽음 1 - 알렉산드로 리트비넨코

그는 영국으로 망명하며 푸틴 정권에 각종 비리와 음모를 폭로하는 데 앞장섰고 1999년 일어났던 러시아 아파트 폭탄 테러 사건의 배후로 푸틴을 지목했다. 

 당시 300명에 가까운 민간인이 사망한 해당 사건은 체첸 무장 세력들에 의한 테러라고 보도되었는데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반 체첸 의식을 펼친 푸틴은 국민들의 큰 지지를 받았고 이는 실제로 푸틴이 대통령이 되는 데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 리티빈 앤코는 이것이 푸틴이 러시아 집권을 위해 꾸민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 

그 폭로 있고 난 후 2006년 11월 런던 시내 호텔에서 전직 동료들과 만나 홍차를 마시고 돌아온 리트비넨코는 돌연 정신을 잃고 쓰러져  3주 뒤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알렉산드로 리트비넨코

 부검 결과가 더욱 수상했다. 리트비넨코의 체내에서 방사성 물질에는 폴로늄이 검출되었다. 이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물질이 아니라 푸틴이 그 배후가 아니냐는 강력한 의심을 받고 있다. 

 

 의문스러운 죽음 2 - 안나 폴리트콥스카야

안나 폴리트콥스카야

 그녀는 러시아의 언론 기자였습니다. 그녀는 현 푸틴 정권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내용들의 기사를 주로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로 인해 안나는 지속적으로 목숨에 위협을 받았고 실제 독살 시도까지 겪었다. 하지만 이에 꺾이지 않고 안나는 꾸준히 정권을 비판하고 2004년에는 정권 비판을 담은 책까지 출간했다.

 그리고 2년 뒤인 2006년 10월 7일 그녀는 자택을 나서는 엘리베이터에서 괴한에게 총으로 저격당해 숨졌다. 

 

 의문스러운 죽음 3 -   보리스 넴초프

보리스 넴초프

보리스 넴초프는 전 러시아 부총리로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었다. 

냄초프는 푸틴의 통치 방식을 비판하며 반정부 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던 2015년 2월 붉은 광장 인근을 걷던 렘초프는 차를 탄 괴한들에게 네 발의 총격을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해당 날은 대규모 반정부 집회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이러한 의혹들이 있더라도 어찌저찌 정권을 유지했지만 최근 전쟁을 일으키며 푸틀러라고도 불리며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비판을 많이 먹는 정치인이 되었다. 하루 빨리 전쟁이 끝나 안타까운 뉴스들이 더이상 나오지 않는 날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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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타마 싯다르타는 누구인가?

 

불교의 창시자인 그는 바로 고타마 시타르타 즉 붓다입니다.

성은 고타마 이름은 시타르타입니다. 석가족의 성자라는 뜻으로 석가모니라고도 합니다.

붓다는 깨달은 자라는 호칭입니다. 다르게는 부처라고도 부릅니다. 또한 세존 석존 열애 등등 다양한 존칭이 있습니다.

 

붓다의 유년기

 

붓다의 생애 또한 기록이 다양합니다.

그는 기원전 624년 인도 북쪽 현재 네팔 지역에서 카필라국 왕자로 태어납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앞으로 일곱 걸음 걸어가더니 한 손으로는 하늘을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천하의 내가 가장 존귀하며 괴로움으로부터 편안하게 하겠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한편 카필라국 왕인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 한가지 예언을 듣습니다 . 그것은 붓다가 미래의 나라를 다스릴 위대한 왕이 되거나 출가해 인류를 구원할 인물이 될 것이라고...

붓다의 아버지는 붓다가 커서 위대한 왕이 되길 바랬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어려서부터 다양한 언어와 학문 그리고 무술을 배웁니다. 

붓다의 고민

 

이렇게 풍족한 환경에서 크던 붓다는 20살이 되던해 아주 중요한 목격을 하게 됩니다. 고통이란 것을 보게 된 것이죠. 

성에는 동남 서 북 4개의 문이 있었습니다.

먼저 동문으로 나간 붓다는 노인을 보았습니다. 누구나 늙는다는 것을 깨달았죠. 다음으로 남문에 가니 고통받는 병자를 보았습니다.

서문에서는 죽은 자를 보았고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마지막 북문에서는 출가 수행자를 만납니다. 그리고 고통에서 벗어날 희망을 가지게 되죠. 이후로 붓다는 고통이 무엇인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출가 결심(29세)

 

이 목격 이후 자꾸만 사색에 잠겨 있으니 혹시나 붓다가 출가하진 않을까 아버지인 왕은 항상 걱정했습니다. 

그리하여 호화로운 환경을 조성해주고 환락에 빠지게 해 다른 생각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붓다는 그런 환경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출가를 결심합니다. 그때가 29살이었습니다.
부따는 출가 후 3명의 스승을 만납니다 고행을 닦는 스승과 명상을 하는 스승이 있었습니다. 

붓다는 이들에게 배우다 고행이란 방법으로 수행을 택했습니다. 이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업을 걷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로부터 6년동안 고행수도에 들어갑니다. 단식은 기본이고 오물을 먹는 등 몸이 가죽만 남을 정도로 혹독하게 수도하였습니다. 

 

 

깨달음을 얻다.(35세)

 6년 고행수도로 그는 이 방법은 답이 없다고 판단합니다. 

붓다는 목욕을 하고  피팔라 나무 아래에서 깊은 명상에 빠졌습니다. 그 순간 온갖 번뇌가 그를 방해했지만 흔들리지 않았고 마침내 해가 뜨는 동쪽을 바라보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때가 35세 입니다. 

 

꺠달음을 전달하다. 

깨달음을 얻은 붓다에게 브라만교의 신인 브라흐마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달해달라고 부탁들 받습니다. 

어떻게 이 깨달음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긴 고민 끝에 붓다는 중생들에게 널리 깨달음을 전파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이후 붓다는 45년 동안 설법을 합니다.  천민부터 왕 신분과 관계없이 그리고 똑똑하든 어리석든 상관없었습니다. 심지어 살인자도 있었죠.

특히 잘 알려진 10명의 제자는 훗날 불교 전파에 큰 역할을 합니다.

 

붓다의 마지막 공양

 

붓다의 제자 중 춘다라고 가난한 대장장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붓다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고 감사한 마음에 붓다와 제자들에게 공양을 올리게 해달라 부탁했습니다.

붓다는 침묵으로 승낙했고 춘다는 서둘러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얼마 후 그는 준비한 음식을 차례로 나누어 주고자 했습니다. 먼저 붓다에게 공양을 전하자 그 음식을 보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 춘다여 남은 음식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말고 땅 속에 묻도록 하라 " 

 그렇게 붓다는 음식을 혼자서 먹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음식에는 먹어선 안 될 독버섯이 들어 있었기 떄문입니다. 

가난했던 춘다는 음식 재료를 야생에서 구하다 실수를 했고 붓다는 알고도 그 음식을 먹었던 것입니다.

붓다는 얼마 후 식중독 증세를 일으켰습니다. 분노한 제자들은 춘다를 추궁했습니다. 춘다 또한 몹시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붓다는 오히려 춘단을 위로했습니다. 비록 실수였지만 그 공덕만큼은 아주 크다고 말했습니다.

 

부따의 몸은 식중독으로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그는 곧 생을 마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설법을 합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아 의지하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 의지하라 모든 것은 소멸한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그리고 얼마 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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