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도감/국내편

충무공 이순신의 죽음 - 조선 최고 영웅의 최후

해금도감 2023. 5. 4.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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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 - 충무공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 

성웅, 군신 등 어떠한 수식어를 붙혀도 부족한 위인 이순신의 최후의 전투는 노량해전이었습니다. 

노량해전은 음력 1598년 11월 19일 경상우도 남해현의 노량해협에서의 전투였는데 이순신이 이끌었던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은 노량 앞바다에서 적들의 길목을 차단한 뒤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이순신은 퇴각하는 왜군 병력을 다시 본국으로 보내면 훗날 재침략의 불씨가 될 거라 확신했고 이를 막기위해 단 한척의 왜선도 보내주지 않기 위한 최후 섬멸전을 펼친 것이었습니다. 

노량해전

 새벽 4시경 시작된 이 전투는 아침해가 떠오를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 전투의 결과는 조선측의 대승이었습니다. 

 

당시 왜군의 선박의 수는 최소 300척에서 최대 500척이었는데 이 전투 70%를 잃었다고 합니다. 또한 살아남은 30%는 전투 의지를 상실한 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고 전해집니다. 

 그에 대비해 조선은 10명 정도의 장교급 인사가 전사했고 판옥선 1척이 소실된 것 이외에는 피해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10명 정도의 장교급 인사 중 이순신 장군도 포함되어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을 막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가 임진왜란을 끝내고 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죽음에는 두가지 설이 있습니다.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가설 1. 의도적 죽음설

당시 임금인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권력이 땅으로 떨어졌었습니다. 그래서 선조에게 있어 이순신은 임진왜란을 승리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존재였습니다. 실제로 이순신은 국민들에게 국가적인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고 당시 민간에서는 그 위상이 선조보다 높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리하여 이를 견제하기 위해 선조는 전쟁 중 이순신을 옥에 가두는 등 그 명성과 위상을 꺾으려고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었습니다. 

 그래서 이 의도적 죽음설은 이러한 배경을 잘 알고 있었던 이순신은 마지막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후 자신을 의도적으로 죽음으로 내몰아 후환을 없앴다는 가설입니다. 

 

의도적 죽음설의 근거들 

이것을 유추할 수 있는 문헌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순신의 그림자와도 같았던 부하 류형은 이순신이 죽고 난 후 생전 자신에게 했던 말을 전했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예로부터 대장이 자기가 세운 전공에 대하여 인정을 받아보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는다면 대개는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적이 물러나는 그 날 죽음으로써 유감 될 수 있는 일을 없애도록 하겠다" 

또한 이순신은 생전 측근들에게 "전쟁 마지막 날에 죽기를 소망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문신 이민서의 <김충장공유사>에는 '이순신도 바야흐로 전쟁 중에 갑주를 벗고 앞장서 나섬으로써 스스로 탄환에 맞아 죽었다. 호남과 영남 등지에서는 부자 형제들이 서로 의병이 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는 내용이 있습니다.

김충장공유사

 

이 내용은 실제로 갑옷을 벗어던졌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앞장서서 싸웠다는 고사구절의 한 표현이라고 하지만 당시 이순신이 선조와 겪었던 일을 생각해보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숙종 때 좌이정을 지낸 판부사 이이명의 문헌 <가승발>에서 이순신을 두고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공은 용의주도하게 방비하여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왜 몸을 버리고 죽어야 했을까? 세상 사람들이 말하되 공이 성공한 뒤에도 몸이 위태로워질 것을 스스로 헤아리고 화살과 탄환을 맞으면서도 피하지 않았다고 했다. 어허, 참으로 슬프도다'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가설 2. 은둔설

이순신은 명량해전 직후 가장 아꼈던 셋째 아들 이면을 잃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순신은 '살생과 업보로 죄를 지은 자신이 죽어야 하는데 아들이 먼저 떠나고 말았구나'라고 일기에 적고 면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왜군들은 시시각각 조선을 압박해오고 있었고 전쟁 중에 부하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순신은 슬픔을 뒤로 하고 왜군들과 맞서 싸웠으나 정작 국왕이었던 선조 자신을 견제하기에 바빴습니다. 이렇게 갖은 상황 속에서 환멸을 느낀 이순신이 맡은 바 역할을 다하고 자신의 죽음을 위장하여 그 뒤로 15년을 더 살았다는 것이 바로 은둔설입니다

 

의도적 죽음설의 근거들

이순신은 노량해전 때 전쟁에 참여시키지 않았던 맏아들 이회와 조카 이완, 몸종이었던 김이를 데려갔습니다. 

이순신이 왜군이 쏜 총탄을 막고 임종을 다 할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역시 이들 셋이었다고 합니다. 이순신이 명을 달리하고 그의 지휘권을 이어받은 사람 역시 경험이 많던 여타 장수들이 아닌 그의 아들 회였습니다. 그렇게 이순신은 아들과 조카의 도움을 받아 절제절명의 순간 죽음을 숨길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또한 국장으로 치뤄진 이순신의 묘가 15년 뒤인 1614년에 600m 떨어진 곳으로 이장되었는데 이를 근거로 1614년이 이순신이 진정 죽음을 맞이한 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은둔설과 관련해서 남겨진 문헌은 하나도 남겨져 있지 않고 노량해전 이 후 이순신을 목격했다는 사람 역시 없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위의 두가지 가설 모두 그저 가설에 불과하고 이순신은 노량해전 중 전사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어떤 것이 사실이던 간에 이순신이 있었기에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고 그가 진정 나라와 부하들을 생각하는 충무공이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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