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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에 간 684 특수부대의 탄생 배경

1968년 1월 21일 북한에서 무장공비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휴전선을 넘어와 서울에 침투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들은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작전 지시를 받고 서울 시내까지 진입하게 되는데 다행히 대한민국 군경이 이를 발견하고 31명 중 30명의 북한 무장공비들을 모두 사살하였습니다.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는 기자회견에서 박정희의 목을 따러 왔다며 라고 당당하게 인터뷰했고 이 장면을 생중계로 보고 있던 정부와 국민들은 매우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한 북파 공작원 창설을 명령합니다.

그렇게 중앙정보부의 주도 아래 육해공 참모총장이 모여서 북한에 침투시키기 위한 특수부대 684부대를 창설합니다.

 

부대의 한계점

하지만 이 특수부대는 큰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임무인 김일성을 암살한다고 하더라도 북한과의 전면전으로 확대될 위험이 있었고 미국 또한 이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한반도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하면 거기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이 부대 창설을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는 그에 굴하지 않고 한 가지 묘책을 떠올리는데 공작부대를 창설하되 그 소속을 철저히 국가 기밀로 감싸고 공작원들의 신분 또한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을 차출해 구성하기로 결정합니다.

군인 신분으로 북한으로 넘어간다면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지만 그 신분이 일반인이라면 정전협정 위반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부에서는 전국에서 청년들을 돈으로 회유하는 방법을 활용하여 이들을 차출해 데려왔고 그 인원수는 청와대를 기습한 북한 무장공비의 31명에 맞춰 31명을 선발하였습니다.

 

실미도에서의 지옥과도 같은 훈련

이들의 부대 위치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로 정해졌는데 이곳이 바로 인천에 위치한 작은 섬 실미도입니다.

실미도 부대를 육성할 교관 또한 이름과 계급을 모두 위장하여 투입되었고 이렇게 모인 31명은 아무도 살지 않은 외딴 곳에서 철저한 국가 기밀의 보안 속에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한 훈련을 시작합니다.

영화'실미도'의 한장면

산을 오르는 훈련을 하던 중 뒤처지는 인원이 보일 시 뒤에서 교관이 뒤꿈치 쪽에 실탄을 발사했으며 20kg에서 30kg 무게의 완전 군장 상태로 2km를 오가는 전투 수영 훈련을 할 때면 그 무게 때문에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들은 북한에 침투했다가 체포되는 것을 대비해 수류탄을 입에 물고 자폭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훈련이 계속되자 부대 내에서 하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 바로 탈영이었습니다. 

실미도 바로 옆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 무의도 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 곳은 하루 두 번 썰물 때 갯벌로 이어지는 섬이었습니다.  이 타이밍을 이용해 일부 인원들이 도망을 가게 되었는데 얼마 가지 못해 붙잡히고 붙잡힌 그들은 말도 못할 정도의 집단 구타를 당하게 됩니다. 이 때 집단 구타가 너무 심해 사망자 마저 발생하게 됩니다.

 

이렇게 지옥같은 실미도에서의 가혹 행위와 훈련으로 31명 중 7명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청천병력과도 같은 소식과 반란 

 살아남은 훈련병들은 이제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끝장을 보자는 일념 하나로 점차 살인 병기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미 훈련 기간은 18개월을 넘긴 1969년 10월 북한의 투입 지시만 바라보던 부대원들에게 드디어 완전 무장 후 집결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실미도 부대원들은 모든 준비를 마친 채 출동 명령을 기다리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부로부터 지시된 명령은 출동 명령이 아닌 작전 취소 명령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국제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긴장이 완화되면서 남북 또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자 침투 작전은 기약 없이 연기되었습니다.

작전 취소 후 부대원들은 실미도로 복귀했고 아무런 지시도 받지 못한 채 2년이라는 세월을 휴가와 면회도 없이 허송세월 하며 보내야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존재가 더 이상 쓸모없게 됐고 정부가 보안 유지를 위해 부대원들을 몰살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게 되자 부대원들은 이 고립된 섬을 탈출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담판을 짓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렇게 훈련 중 사망한 7명을 제외한 24명의 실미도 부대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1972년 8월 23일 새벽 6시 실미도 부대원들은 실탄으로 무장한 총을 들고 교관이 있는 막사를 기습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훈련을 담당하던 교관 12명이 사살되었고 나머지는 화장실 숲속에 숨거나 바다로 뛰어들었으며 교관 6명이 익사하게 됩니다.

제 아무리 베테랑 군인이라도 3년간 살인 병기로 길러진 실미도 부대원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죠.

순식간에 벌어진 이 사건으로 공작원 측도 한 명이 사망하고 나머지 23명은 실미도를 장악하게 됩니다.

곧이어 이들은 집단 탈출을 감행하는데 해가 뜨기 시작하자 배를 타고 실미도를 빠져나와 낮 12시경 인천의 옥련동 해안에 상륙하였습니다.

하지만 근처에 있던 해안 초소자가 이들을 발견하고 곧바로 보고를 올렸습니다.

23명의 부대원들은 수인선 송도역 앞 삼거리에서 시내버스를 탈출해 서울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12시 56분경 해안선 초소에 연락을 받고 대기 중이던 군인들과 총격전이 벌어졌으며 이 총격전으로 부대원들이 타고 있던 타이어가 펑크가 나게 됩니다. 이 때문에 버스가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다른 버스를 탈취하여 다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2시 23분경 이들이 탄 버스는 서울 대방동에서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추게 되는데 그곳이 유한양행 본사 앞이었습니다.

이어서 대기하고 있던 육군 3사단 병력이 급하게 버스를 포위하고 양측 간의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이미 버스는 움직일 수가 없었고 버스 내부에 있던 실미도 대원들은 주변을 둘러싼 육군과 경찰의 포위에 더 이상 저항할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렇게 이들 중 일부는 버스 안에서 수류탄을 꺼내 자폭한다는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되고 버스 안에서는 수류탄이 터졌습니다. 여기서 4명을 제외한 나머지 대원들은 사망하게 됩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4명의 부대원들은 큰 부상을 당했지만 숨이 붙어 있었고 이들은 곧바로 체포됩니다.

그리고 정부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진 이 사건에 대해 북한 무장간첩이 서울에 진입하였으나 우리 군인들이 교전 끝에 모두 사살했다는 북한 소행의 실미도 난동 사건으로 공식 발표합니다.

 

반란 그 후..

자폭에서 살아남은 4명의 부대원들은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진상조사에서 실미도 부대에 대한 폭로와 억울함을 호소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국가 기밀이기 때문에 알려줄 수 없다는 일관된 발언으로 진술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진술 역시 군 관계자에 의해 강요된 진술이었는데 실미도 부대의 기밀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했던 군 관계자는 살아남은 이들에게 이대로 가면 어차피 사형을 당할 게 뻔하니 사건에 대해 입을 다문다면 사형을 면해준과 동시에 월남으로 보내준다고 약속한 것이었습니다. 

그 약속은 당연히 거짓말이었고 이들은 끝까지 이용만 당한 채 이들의 3월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 유언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애들 3남매가 제일 불쌍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 - 김창구

"김일성의 목을 베지 못하고 죽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 임성빈

"살아 생전 국가에 대해 말도 못하고 죽어가는게 아깝습니다. 제가 죽더라도, 집에 알리지 말아주십시오." - 김병엽

"국가를 위해 싸우지도 못하고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죽는게 억울합니다.." - 이서천

 

뒤늦게 알려진 이야기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사실 정부는 이 부대에 대해 관심을 꺼둔 것은 맞지만 그대로 방치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당시 공군 참모총장의 인터뷰에 의하면 1972년 당시 대통령 선거가 한창이었고 다들 선거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터라 실미도 부대에 대한 처리를 미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늦어도 10월까지는 이 부대를 해체하기로 얘기를 나눴는데 공교롭게도 그해 8월에 사건이 터진 것이라고 합니다. 

 

억울하게 죽은 실미도 부대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당시 탈취된 버스 안에 타고 있던 한 승객의 인터뷰에 의하면 부대원들이 버스를 습격했지만 그렇게 악한 느낌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저 박정희를 죽이러 청와대에만 갈 목적이니 조용히 하라고만 했고 가는 동안에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고 합니다. 

이 승객과 이야기를 나눈 어느 부대원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이를 본 승객이 가지고 있던 아기 기저귀를 찢어 지열대 해줬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부대원은 승객에게 오늘 살아남기는 힘들 것 같으니 이 쪽지를 고향에 보내달라고 건네면서 자신에 대해

" 나는 박기수다 집은 충북 옥천 19살의 집에서 나왔고 집에서는 나의 거처를 모르고 있다. 나는 왼쪽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으며 30분 후면 죽는다 "라고 했습니다. 

 

박기수를 비롯한 나머지 부대원들도 19살에서 21살 사이의 평범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정부는 당장 사라져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가난한 청년 31명을 전국 각지에서 데려와 섬에 감금했고 이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의 훈련을 받게 했습니다. 

모두가 가난하고 못 살던 시절 훈련만 받으면 큰 돈을 준다는 말에 미혹된 순수한 청년들은 이 돈으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실미도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는 이들에게 보상은 커녕 쓰고 내다버려 헌신적으로 취급했고 사건이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존재 자체를 묵살하려고 했고 마지막까지도 이용만했습니다. 

 

이 실미도 사건은 당시 생존했던 기간병들과 관계자들에 의해 꾸준히 진상 규명 운동이 진행되었으며 2005년에는 한 제보자에 의해 버스에서 사망한 실미도 부대원들의 유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렇게 버스에서 죽은 부대원들은 실종된 지 38년 만에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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