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5일, 충북 청주시 흥덕구의 한 다세대 주택에서 강씨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아들 송군이 집에 돌아왔을 때, 집안은 난장판이었고 어머니 강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2002년 실종된 강정숙
집안은 전화선이 뽑혀 있고 부엌에는 저녁 준비 도중인 재료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강씨의 가족들은 강씨의 실종을 걱정하며 기다렸으나, 강씨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실종 23일째 되던 날, 강씨의 시신은 건물 옥상 물탱크실에서 심하게 부패된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숨겨진 진실: 범인의 동기와 용의자
2-1. CCTV에 찍힌 용의자
강씨의 카드가 사용된 은행의 CCTV에는 20대에서 3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 강씨의 카드를 사용하여 현금을 인출하는 장면이 찍혔습니다.
cctv에 찍힌 범인의 모
이 남성은 작은 키에 다부진 몸매를 가졌고, 모자를 쓰고 큰 코가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상을 통해서는 범인의 신원을 확실히 알 수 없었고, 범인의 얼굴이 흐릿하게 찍혀 있어 경찰은 이를 통해 범인을 특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2-2. 가족이 범인 아니야??
사실 초기에는 경찰은 처음에 강씨의 남편 송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습니다.
우선 강씨의 카드 비밀번호를 알고 있기도 했고, 90%이상 아는 사람의 범행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송씨는 사건 당시 알리바이가 입증되었고, 그는 교통사고로 인한 중증 지체 장애를 가지고 있어 범행을 저지르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아들 송군과 딸 송양 역시 사건 당시 학교에 있었으며, 어머니 실종을 처음 발견하고 신고한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알리바이가 확실하여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미궁 속으로: 범인을 왜 잡지 못했는가?
경찰이 범인을 잡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사건 초기 경찰은 강씨의 실종을 단순 가출로 판단하며 초동 수사에 실패했습니다. 강씨의 핸드폰이 청주 시내를 돌아다닌 흔적과 은행에서의 현금 인출 기록을 무시한 채, 중요한 단서를 놓쳤습니다. 또한, 물탱크까지 가는 경로에 대한 CCTV가 없거나 작동하지 않아 범인의 이동 경로를 추적할 수 없었습니다. 초기 수사에서 놓친 증거들이 사건 해결에 큰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미제로 남은 사건의 진행
강씨 살인 사건은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습니다. 2011년, 강씨의 딸이 재수사를 요청하여 청주 흥덕 경찰서가 재수사를 시작했으나, 여전히 진전은 없는 상태입니다. 2021년에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이 19년 만에 CCTV에 찍힌 용의자의 얼굴을 공개하며,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습니다. 흐릿하게나마 남아 있는 CCTV 속 용의자의 얼굴이 언젠가는 진범을 찾는 단서가 되기를 바라는 가족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경찰의 초기 수사 실패와 증거 부족으로 인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지만, 가족들은 여전히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강씨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고 범인이 잡히는 날이 오기를 희망합니다.
1998년 10월 16일, 대구의 한 대학에 재학 중이던 정은희 양은 학교 축제 기간 동안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밤 10시 30분쯤, 피곤해하는 남자친구 피군을 배웅하며 캠퍼스 교문을 함께 나섰습니다. 그러나 약 30분 후, 피군은 병원 앞에서 홀로 깨어났습니다.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피군은 은희 양에게 연락을 시도했으나 응답이 없었고, 그녀가 혼자 집에 갔을 것이라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의문의 교통사고와 답답한 경찰의 초동 수사
다음날 새벽 5시 10분경, 대구 달서경찰서에 한 화물 트럭 운전자로부터 교통사고 사망 신고가 접수되었습니다. 화물 트럭 운전자 최씨는 한 여성이 고속도로 중앙 분리대를 넘어 무단횡단을 하다가 트럭에 치여 사망했다고 신고했고, 그 여성은 바로 정은희 양이었습니다. 경찰은 이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규정하고 수사를 종결했으나, 유가족은 경찰의 미흡한 수사에 의문을 제기하며 재수사를 요청했습니다. 정은희 양이 사망한 고속도로는 그녀의 평소 생활 반경과 거리가 멀었으며, 사고 당시 술에 심하게 취해 있지도 않았습니다.
유가족의 의문과 발견된 증거
유가족은 은희 양의 사망 경위에 대해 많은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특히 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은희 양의 속옷은 성폭행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속옷이 은희 양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유가족은 경찰의 부실한 수사를 비판하며, 속옷에 대한 국가수 감정을 요청했습니다. 이후 경찰은 사건을 교통사고로 서둘러 종결했으나, 유가족은 지속적으로 재수사를 요구하며 60여 차례의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2013년, 검찰은 정은희 양의 속옷에서 스리랑카 남성 케인의 DNA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5년만에 잡힌 용의자 케
검찰의 재수사에 따르면, 사건 당일 케인과 그의 동료들은 술에 취한 정은이 양과 피군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자전거에 정은이 양을 태우고, 고속도로 아래 굴다리 근처로 끌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케인과 그의 동료들은 피해자를 집단 성폭행했고, 현금과 학생증을 빼앗은 후 현장을 떠났습니다. 겁에 질린 은희 양은 고속도로로 향해 도움을 청하려 했으나, 중앙 분리대를 넘다가 트럭에 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피해 재연
남자친구는 뭐했나..??
남자친구 피군은 사건 당일 정은이 양과 함께 있었으나, 병원 앞에서 홀로 깨어난 이후 여자친구의 행방을 알지 못했습니다. 피군은 당시의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고 진술했으며, 경찰 조사에서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검찰은 결국 케인을 스리랑카로 추방시키고, 스리랑카 법원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했습니다.
스리랑카에서의 강간죄 공소시효가 20년이기 때문에, 검찰은 신속하게 사법 공조를 통해 케인을 기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정은이 양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많은 의문을 남기고 있습니다. 유가족은 정은희 양의 사망 경위와 관련하여 여러 의혹을 품고 있으며, 경찰의 초기 수사 실패와 허위 진술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유가족과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아쉬움과 분노를 남기며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검찰에서는 아직 발표한 사실은 없지만 언론에서는 주가를 실제로 조작하는 사람이 돈을 투자할 사람들을 모집했는데 돈을 투자한 사람이 새로운 투자자를 데리고 오면 얻는 수익에 일부를 추가로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다단계 투자방식 이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세력들 내부에서 일부는 큰 돈을 벌고 일부는 작은 돈을 벌면서 갈등이 생겼는데 불만을 가진 그룹에서 단체로 매도를 해버려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임창전 작전 세력 의혹
이 하한가 사태에서 의심되는 사람 10명 중 한명이 가수 임창정입니다.
2023년 초 임창정은 작전 세력에게 신분증을 맡기며 30억원을 투자해 한달사이에 거의 2배인 58억원 까지 불렸으나 주식이 급락하여 현재 계좌에는 1억 8900만원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를 근거로 자신도 피해자라며 자신이 만약 작전 세력이라면 이렇게 큰 손해를 봤겠느냐며 주장했고 자신도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대부분 싸늘합니다.
우선 신분증을 주는 행위 자체가 금융실명제 위반이기에 문제가 될 뿐더러 30억원이 2배로 불었을 때 사업가인 임창정이 수상한 점을 못 느꼈을리 없다며 주가조작 세력으로 보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익이 생길때는 가만히 있다가 돈을 잃고 나서야 주가 조작 세력인지 몰랐다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며 비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는 임창정은 본업이 가수이기에 주식에는 무지해서 조작 세력에 당한것 같다며 옹호하는 대중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임창정은 세력인가 피해자인가?
임창정씨가 주가 조작세력인지 피해자인지는 검찰 조사결과에서 곧 나타나겠지만 결과적으로 큰 손해를 봤으니 피해자 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이 사건은 조작 세력 내에서 문제가 생겨 세상에 드러난 사건입니다.
임창정의 주장은 처음부터 속았을때 할 수 있는 말이지 결과적으로 손해를 봤으니 피해자라는 말은 수긍하기 힘듭니다.
또한 연예인은 타인에게 신뢰감을 심어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많은 투자자들이 아마 유명 연예인이 껴있으니까 안전하겠지라는 인식을 은연중에 심어주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현재 여러 동료 연예인들이 임창정과 연락을 했고 그를 믿고 맡겼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서울 강남 테헤란로의 한 건물에서 10대 여학생 A양이 추락하여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A양은 라이브 방송을 켜둔 채 채팅창을 보며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가 오후 2시 30분 경 투신자살을 감행했습니다.
사건 당일에 있었던 동행자
한가지 특이한 점은 해당 사건이 발생하기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동행자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동행자는 같은 우울증 갤러리에서 만난 사람인데 피해자가 동반자살을 한 사람을 구한다는 글에 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만난 동행자는 죽기 전 소고기랑 노래방 등 계획을 세웠지만 피해자인 여성은 만나자마자 그냥 죽자고 재촉하여 동행자는 겁이나 도망갔다고 합니다.
그 후 해당 동행자는 게시글에 추가적으로 글을 게시했는데 사실 자살할 생각은 없고 피해자의 나약해진 정신을 이용해 하룻밤을 보낼려고 했다고 합니다.
동행자가 올린 글
이 동행자는 자살방조죄를 적용을 하려고 경찰에서 수사 중 이라고 합니다.
원인
1.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
베르테르 효과란 모방자살 효과라고 합니다. 그런데 강남구에서 해당 사건이 발생하기 전 3일전 일본에서 여고생 2명이 옥상에서 핸드폰을 세워두고 녹화하며 투신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번 사건과 굉장히 유사하여 이 사건을 보고 심신이 미약한 피해자가 따라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에 경찰 측은 이번 사건을 모방한 사건이 추가적으로 발생할 것을 우려해 해당 사진이나 영상을 모두 내리도록 지시했습니다.
2. 신대방팸
신대방팸은 신대방동의 한 빌라에서 남성 6명이 동거를 하는 무리들인데 이들은 300여명이 참여한 단체채팅방에서 어린 여성들을 유인해 술을 먹인다는 의혹을 받고 있고 이번 사건의 원인이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대방팸은 이런 의혹을 부인했습니다.
3 남자들과의 성관계
피해자는 우울증 갤러리에서 '노무현'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또한 게시글에 그녀는 남성들과 성매매를 했음을 암시하는 글들을 많이 올렸습니다.
피해자가 디시에 올린 글 중 하나
대치동 강사와의 관계
또한 현재 수사 중 나온 사실로는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에서 수학 강사로 활동하는 30대 B씨가 2021년 12월 피해자와 성관계를 맺은 뒤 돈을 지불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B씨는 피해자와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택배로 전자담배를 보내주거나 대학 진학 서류를 검토해주는 등 신뢰를 쌓았다고 합니다.
이 후 피해자 거주지 인근의 숙박 업소에서 성관계를 맺고 현금 20만원을 계좌로 입금했다고 합니다.
이 일에 있어서 B씨는 "당시 성관계는 강요가 아니라 합의에 의한 것이고 돈을 준 것은 맞지만 성관계와는 관계가 없다. 만나러 오고 싶은데 돈이 없다고 해 교통비로 쓰라고 준거다" 라며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피해자가 미성년자인 점과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그루밍 범죄에 해당하며 경찰은 해당 사건이 이슈가 된만큼 철저히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임신
사건이 있기 며칠전에는 우울증 갤러리에서 만난 또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하다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해당 남성은 책임지지 않고 도망가 절망하며 자해하는 듯한 글을 올렸습니다.
이 때부터 그녀는 긴급 피임제, 사후피임약에 대한 글을 올리며 자살을 암시하는 듯한 글을 올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해당 사건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사건 이 후
사건이 발생 한 후 근원지인 디시인사이드에서는 피해자에 관한 글은 모두 삭제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글 뿐만 아니라 해당갤러리를 전체적으로 폐쇠해야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울증 갤러리에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는 극히 드물고 소수의 아픔을 즐기는 이들도 많고 그것을 이용해 이번처럼 그루밍 성범죄 등 많은 문제들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에서 무장공비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휴전선을 넘어와 서울에 침투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들은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작전 지시를 받고 서울 시내까지 진입하게 되는데 다행히 대한민국 군경이 이를 발견하고 31명 중 30명의 북한 무장공비들을 모두 사살하였습니다.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는 기자회견에서 박정희의 목을 따러 왔다며 라고 당당하게 인터뷰했고 이 장면을 생중계로 보고 있던 정부와 국민들은 매우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한 북파 공작원 창설을 명령합니다.
그렇게 중앙정보부의 주도 아래 육해공 참모총장이 모여서 북한에 침투시키기 위한 특수부대 684부대를 창설합니다.
부대의 한계점
하지만 이 특수부대는 큰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임무인 김일성을 암살한다고 하더라도 북한과의 전면전으로 확대될 위험이 있었고 미국 또한 이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한반도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하면 거기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이 부대 창설을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는 그에 굴하지 않고 한 가지 묘책을 떠올리는데 공작부대를 창설하되 그 소속을 철저히 국가 기밀로 감싸고 공작원들의 신분 또한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을 차출해 구성하기로 결정합니다.
군인 신분으로 북한으로 넘어간다면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지만 그 신분이 일반인이라면 정전협정 위반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부에서는 전국에서 청년들을 돈으로 회유하는 방법을 활용하여 이들을 차출해 데려왔고 그 인원수는 청와대를 기습한 북한 무장공비의 31명에 맞춰 31명을 선발하였습니다.
실미도에서의 지옥과도 같은 훈련
이들의 부대 위치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로 정해졌는데 이곳이 바로 인천에 위치한 작은 섬 실미도입니다.
실미도 부대를 육성할 교관 또한 이름과 계급을 모두 위장하여 투입되었고 이렇게 모인 31명은 아무도 살지 않은 외딴 곳에서 철저한 국가 기밀의 보안 속에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한 훈련을 시작합니다.
영화'실미도'의 한장면
산을 오르는 훈련을 하던 중 뒤처지는 인원이 보일 시 뒤에서 교관이 뒤꿈치 쪽에 실탄을 발사했으며 20kg에서 30kg 무게의 완전 군장 상태로 2km를 오가는 전투 수영 훈련을 할 때면 그 무게 때문에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들은 북한에 침투했다가 체포되는 것을 대비해 수류탄을 입에 물고 자폭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훈련이 계속되자 부대 내에서 하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 바로 탈영이었습니다.
실미도 바로 옆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 무의도 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 곳은 하루 두 번 썰물 때 갯벌로 이어지는 섬이었습니다. 이 타이밍을 이용해 일부 인원들이 도망을 가게 되었는데 얼마 가지 못해 붙잡히고 붙잡힌 그들은 말도 못할 정도의 집단 구타를 당하게 됩니다. 이 때 집단 구타가 너무 심해 사망자 마저 발생하게 됩니다.
이렇게 지옥같은 실미도에서의 가혹 행위와 훈련으로 31명 중 7명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청천병력과도 같은 소식과 반란
살아남은 훈련병들은 이제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끝장을 보자는 일념 하나로 점차 살인 병기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미 훈련 기간은 18개월을 넘긴 1969년 10월 북한의 투입 지시만 바라보던 부대원들에게 드디어 완전 무장 후 집결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실미도 부대원들은 모든 준비를 마친 채 출동 명령을 기다리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부로부터 지시된 명령은 출동 명령이 아닌 작전 취소 명령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국제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긴장이 완화되면서 남북 또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자 침투 작전은 기약 없이 연기되었습니다.
작전 취소 후 부대원들은 실미도로 복귀했고 아무런 지시도 받지 못한 채 2년이라는 세월을 휴가와 면회도 없이 허송세월 하며 보내야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존재가 더 이상 쓸모없게 됐고 정부가 보안 유지를 위해 부대원들을 몰살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게 되자 부대원들은 이 고립된 섬을 탈출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담판을 짓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렇게 훈련 중 사망한 7명을 제외한 24명의 실미도 부대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1972년 8월 23일 새벽 6시 실미도 부대원들은 실탄으로 무장한 총을 들고 교관이 있는 막사를 기습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훈련을 담당하던 교관 12명이 사살되었고 나머지는 화장실 숲속에 숨거나 바다로 뛰어들었으며 교관 6명이 익사하게 됩니다.
제 아무리 베테랑 군인이라도 3년간 살인 병기로 길러진 실미도 부대원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죠.
순식간에 벌어진 이 사건으로 공작원 측도 한 명이 사망하고 나머지 23명은 실미도를 장악하게 됩니다.
곧이어 이들은 집단 탈출을 감행하는데 해가 뜨기 시작하자 배를 타고 실미도를 빠져나와 낮 12시경 인천의 옥련동 해안에 상륙하였습니다.
하지만 근처에 있던 해안 초소자가 이들을 발견하고 곧바로 보고를 올렸습니다.
23명의 부대원들은 수인선 송도역 앞 삼거리에서 시내버스를 탈출해 서울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12시 56분경 해안선 초소에 연락을 받고 대기 중이던 군인들과 총격전이 벌어졌으며 이 총격전으로 부대원들이 타고 있던 타이어가 펑크가 나게 됩니다. 이 때문에 버스가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다른 버스를 탈취하여 다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2시 23분경 이들이 탄 버스는 서울 대방동에서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추게 되는데 그곳이 유한양행 본사 앞이었습니다.
이어서 대기하고 있던 육군 3사단 병력이 급하게 버스를 포위하고 양측 간의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이미 버스는 움직일 수가 없었고 버스 내부에 있던 실미도 대원들은 주변을 둘러싼 육군과 경찰의 포위에 더 이상 저항할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렇게 이들 중 일부는 버스 안에서 수류탄을 꺼내 자폭한다는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되고 버스 안에서는 수류탄이 터졌습니다. 여기서 4명을 제외한 나머지 대원들은 사망하게 됩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4명의 부대원들은 큰 부상을 당했지만 숨이 붙어 있었고 이들은 곧바로 체포됩니다.
그리고 정부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진 이 사건에 대해 북한 무장간첩이 서울에 진입하였으나 우리 군인들이 교전 끝에 모두 사살했다는 북한 소행의 실미도 난동 사건으로 공식 발표합니다.
반란 그 후..
자폭에서 살아남은 4명의 부대원들은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진상조사에서 실미도 부대에 대한 폭로와 억울함을 호소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국가 기밀이기 때문에 알려줄 수 없다는 일관된 발언으로 진술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진술 역시 군 관계자에 의해 강요된 진술이었는데 실미도 부대의 기밀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했던 군 관계자는 살아남은 이들에게 이대로 가면 어차피 사형을 당할 게 뻔하니 사건에 대해 입을 다문다면 사형을 면해준과 동시에 월남으로 보내준다고 약속한 것이었습니다.
그 약속은 당연히 거짓말이었고 이들은 끝까지 이용만 당한 채 이들의 3월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 유언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애들 3남매가 제일 불쌍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 - 김창구
"김일성의 목을 베지 못하고 죽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 임성빈
"살아 생전 국가에 대해 말도 못하고 죽어가는게 아깝습니다. 제가 죽더라도, 집에 알리지 말아주십시오." - 김병엽
"국가를 위해 싸우지도 못하고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죽는게 억울합니다.." - 이서천
뒤늦게 알려진 이야기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사실 정부는 이 부대에 대해 관심을 꺼둔 것은 맞지만 그대로 방치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당시 공군 참모총장의 인터뷰에 의하면 1972년 당시 대통령 선거가 한창이었고 다들 선거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터라 실미도 부대에 대한 처리를 미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늦어도 10월까지는 이 부대를 해체하기로 얘기를 나눴는데 공교롭게도 그해 8월에 사건이 터진 것이라고 합니다.
억울하게 죽은 실미도 부대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당시 탈취된 버스 안에 타고 있던 한 승객의 인터뷰에 의하면 부대원들이 버스를 습격했지만 그렇게 악한 느낌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저 박정희를 죽이러 청와대에만 갈 목적이니 조용히 하라고만 했고 가는 동안에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고 합니다.
이 승객과 이야기를 나눈 어느 부대원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이를 본 승객이 가지고 있던 아기 기저귀를 찢어 지열대 해줬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부대원은 승객에게 오늘 살아남기는 힘들 것 같으니 이 쪽지를 고향에 보내달라고 건네면서 자신에 대해
" 나는 박기수다 집은 충북 옥천 19살의 집에서 나왔고 집에서는 나의 거처를 모르고 있다. 나는 왼쪽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으며 30분 후면 죽는다 "라고 했습니다.
박기수를 비롯한 나머지 부대원들도 19살에서 21살 사이의 평범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정부는 당장 사라져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가난한 청년 31명을 전국 각지에서 데려와 섬에 감금했고 이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의 훈련을 받게 했습니다.
모두가 가난하고 못 살던 시절 훈련만 받으면 큰 돈을 준다는 말에 미혹된 순수한 청년들은 이 돈으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실미도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는 이들에게 보상은 커녕 쓰고 내다버려 헌신적으로 취급했고 사건이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존재 자체를 묵살하려고 했고 마지막까지도 이용만했습니다.
이 실미도 사건은 당시 생존했던 기간병들과 관계자들에 의해 꾸준히 진상 규명 운동이 진행되었으며 2005년에는 한 제보자에 의해 버스에서 사망한 실미도 부대원들의 유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렇게 버스에서 죽은 부대원들은 실종된 지 38년 만에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2023년 3월 29일 밤 강남 역삼동의 푸르지오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황대한(35 남), 연지호(29 남)이 최 모씨(40대 여)를 폭행한 뒤 차량에 태워 납치했습니다.
다행히 이 광경을 본 목격자가 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수사를 진행했습니다. 경찰은 3월 30일 오전 대전에서 범행 차량(현대 벨로스터)을 발견했고 발견 당시 차에는 혈흔과 피가 묻은 곡괭이와 케이블 타이, 테이프 등이 있었습니다.
범인들 중 이경우만 피해자와 아는 사이였습니다. 이경우는 황대한에게 범행을 제안했고 황대한은 이 제안을 연지호에게 추가 제안했다고 합니다.
이경우는 직접 범행을 하지 않는 대신 무기를 제공하고 실행은 황대한과 연지호가 했습니다.
진술에 따르면 황대한은 피해자가 저항을 심하게 해 기절시키려고 목을 졸랐는데 사망했으며 살해한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했지만 기나긴 수사 중 이경우가 연장을 꼭 준비해서 죽여야한다고 했다는 둥 이전 발언과 충돌되는 부분이 있는 점과 공범 연지호가 2~3개월 전부터 범행을 준비했다고 한 발언을 해서 사실상 계획 살인이라는 것을 인정한 셈이 되었습니다.
알려진 것은 이 3명이지만 최근 경찰 조사결과에 따르면 이 3명 이외에 최소 4~5명은 공범자가 더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범행의 동기
이 범행의 주범인 이경우는 2020년 피해자 최모 씨와 피해자 가족이 운영하던 업체가 발행한 암호화폐인 퓨리에버라는 코인에 투자 제안을 받고 약 8,000만원을 투자했다가 손해를 봤다고 합니다.
이경우는 이에 범행을 계획했고 피해자의 가방과 휴대전화, 개인정보를 넘겨 피해자의 코인지갑 잔고를 확인해서 빼돌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피해자의 코인 지갑에는 700만원 대 수준의 코인만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다단계 영업 당시 일부 금액을 돌려받기로 했었는데 애초에 이 돈은 없었단 것을 알자 이경우도 허탈했다고 합니다.
이에 코인 관계사는 "영업 행위는 컨설팅 계약을 맺은 자문사가 진행한 것이고, 피해자 역시 코인을 지급한 것 외에는 계약 관계가 없다" 라고 설명했습니다. 즉 피해자가 피의자들에게 투자하라고 일종의 다단계 영업행위를 한 것입니다.
게다가 이미 피해자 최모 씨는 퓨리에버 코인에 투자하여 30억원 가량을 손해때문에 회사를 고소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피해 상황에 다른 사람들에 영업을 한 상황에 피해자에 대한 언론의 시선도 좋지만은 않는 상황입니다.
범행의 핵심 인물들 요약
1. 퓨리에버 대표 이씨
피해자인 최씨, 피의자 유씨, 황씨 부부에게 코인 투자 제안을 합니다. 구체적인 시세를 띄울 방법과 상장 후 물량을 같이 터는 일정까지 짜줌으로써 이익을 보장했습니다.
2. 황씨, 유씨 부부
이 부부는 당초 계획했던 일정보다 빠르게 코인 물량을 털어 코인 가격 폭락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이경우와 최씨는 이 부부를 감금하고 1억 9천만원의 코인을 빼앗았습니다.
빼앗긴 황씨, 유씨 부부는 이경우와 최씨를 '특수강도' 죄로 고소하였으나 이경우만 송치되었습니다.
이 후 이경우는 이 부부를 찾아가 사과를 해서 관계가 개선되었고 유씨 부부는 법률사무소에 이경우를 취업시켜줍니다.
투자한 30억원이 퓨리에버 재단에 의해 지갑 동결이 되어 코인 물량을 털지 못해서 관련된 사람들과 급격하게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4. 피의자 이경우
이번 범행의 주범으로 찍히는 이경우는 퓨리에버 코인에 투자를 했다가 8,000만원 가량 손해를 입었습니다. 이에 열받은 이정우는 피해자 최씨에게 따졌는데 이 때 최씨가 무직이었던 이정우에게 200만원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상의 호의는 바라지 말라며 못을 박자 화가 난 이경우가 연지호와 황대한에게 범죄를 의뢰합니다.
5. 피의자 연지호, 황대한
이번 범행을 실제로 실행한 장본인들입니다.
6. 20대 B씨
수사 중 추가 공범으로 지목되는 사람입니다. 황대한으로부터 지난 1월에 범행 제의를 받았고 미행과 감시가 힘들어 중간에 이탈했다고 합니다.
2022년 5월 22일 새벽 부산 서면의 오피스텔에서 엘리베이터를 대기하고 있던 여성(26세)을 한 남성(31세)이 뒤로 접근해 돌려차기로 여성의 후두부를 가격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후두부를 가격당하기 직전의 cctv 사진
가해 남성은 후두부를 맞고 쓰러진 여성을 4회 더 발로 머리를 밟았습니다. 이에 피해자는 의식을 잃고 손을 늘어뜨리고 기절했는데 가해자는 한 차례 더 머리를 내려찍은 뒤 피해자의 목덜미를 잡고 끌다 어깨에 둘러메고 CCTV가 없는 건물 1층 복도에 옮겨두고 도주했습니다.
입주민에 의해 발견되기 까지 8분이라는 시간이 걸렸는데 이는 CCTV 사각지대라 정확히 어떤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발견 당시 바지 지퍼가 열려있었고, 속옷이 오른쪽 종아리에 걸쳐 있었습니다.
피해자의 상태
피해 여성은 두개내 출혈, 두피의 상처, 뇌손상, 영구 마비가 우려되는 16주 이상의 치료가 필요하한 진단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해리성 기억 상실 장애를 얻어 사건 후 입원까지 2~3일의 기억이 없다고 합니다.
피해자의 사진
병원 치료 1 개월 후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지만 기억력, 집중력 감퇴로 아직까지 치약과 샴푸를 헷갈리는 등 일상생활에 큰 어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가해자는 누구?
가해자는 경호업체 직원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부에서는 경호업체의 탈을 쓴 용역깡패의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게다가 가해자는 이미 전과 4범을 가진 놈입니다. 미성년자 때부터 이미 소년부에 6번이나 송치되어 징역형을 살기도 했으며 이 돌려차기 범죄는 출소 3개월만에 저지른 범행으로 밝혀져 많은 사람의 분노를 샀습니다.
가해자의 사진
가해자는 사이코패스 검사(PCL-R) 테스트 27점, 재범 위험성은 '높음' 수준에 해당한다는 23점을 받았고 프로파일러는 반복된 범행으로 폭력성에 무감각해진 '후천적 사이코패스'로 분석했습니다.
이 사이코패스는 범행 이유로 '길을 걸어가다가 피해자가 자신을 째려보는 것 같아 기분 나빠서 뒤쫒아가 공격하기로 했다', '피해자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 등을 주장했습니다.
가해자에 대한 판결
경찰은 중상해죄를 적용했지만 검찰은 머리를 집중적으로 가격한 점을 보아 살인미수로 기소해 징역 20년을 구형했습니다.
이에 가해자는 폭행 사실은 인정했지만 살인미수 혐의에 대해서는 고의가 없었고 술에 취해 심신미약 상태로 해당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2022년 10월 28일, 부산지방법원은 살인미수죄를 적용해 징역 12년을 선고했습니다. 또한 집행 종료일부터 20년간 위치추적 장치를 부착해야합니다.
피해자 입장에서 터무니 없이 짧은 형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는 형이 무겁다며 항소했고 검찰 역시 이는 형이 가볍다며 항소했습니다.
원래 1월 예정되어있던 재판을 가해자는 병으로 인한 투약을 이유로 두 차례나 법원 불출석을 하며 연기되었고 2023년 3월 15일 연기된 항소심에서 모습을 보였습니다.
피해자측 변호인은 범죄현장에서 속옷이 다리에 걸쳐져 있었던 것과 가해자가 성범죄 처벌 관련 키워드를 검색한 점을 근거로 강간혐의 적용을 위해 DNA 검사를 추가 요청했습니다.
이 사이코패스를 왜 구속 수사를 안하는지도 의문이고 애초에 12년이 판결이 난 것도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2016년 10월 11일 필리핀 팜팡가주 바콜로 지역 사탕수수 밭에서 머리에 총을 맞은 한국인 3명의 시신들이 발견됩니다.
경찰은 수사를 진행하던 중 피해자들의 집을 거의 매일같이 출입하던 남성에 대해 듣게 됩니다. 그는 현지에서 VIP 카지노 사업을 한다는 남자 박왕열이었습니다. 경찰은 그를 추궁했지만 박왕열은 마닐라에서 누구를 만나기로 한 피해자들이 이동을 도와달라고 해서 도와준거 뿐 살인 사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부정했습니다.
모순 1. 너무 가벼운 피해자들의 복장
하지만 박왕열의 이 진술과 사건 현장에는 크게 모순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세 사람은 가벼운 실내복 차림이었는데요. 심지어 속옷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모습이었죠. 경찰들은 정말로 그들이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이동했던 거라면 그런 가벼운 옷차림으로 숙소를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모순 2. 경비실의 출입 대장 기록 불일치
피해자들이 머무는 숙소는 스물네 시간 경비실이 운영되던 곳이었는데 경비실의 출입 대장 기록과 박광렬의 사건 진술도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박왕렬은 그들을 마닐라에 내려준 것이 마지막이었다고 이야기했지만 박왕렬의 차량 출입 기록은 그 이후로도 몇 차례 더 찍혀 있었습니다, 경찰은 이러한 불일치하는 현장 기록 등을 증거로 그를 주요 용의선상에 올려 수사를 진행했는데 이에 위협을 느낀 박왕열은 도주하여 사라집니다.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다.
경찰은 박왕열를 잡기 위해 한국 과학수사팀이 필리핀 현지에 파견되어 피해자들의 숙소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분명 피해자들과 박강열만 생활했다고 알려진 숙소 내의 콜라캔에서 제3자의 지문이 발견됩니다. 조사 결과 지문의 주인은 김춘수라는 한국인 남성으로 밝혀집니다. 그는 박왕열의 지인으로 한국에서 사건발생 7일 만에 체포되었지만 사건 조사중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모든 질문에 모르쇠에 일관한 결과 그는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게 됩니다.
그러던 와중 박왕열은 여자친구가 SNS에 올린 식당 사진이 찍혀 그것을 경찰들이 추적하여 37일 만에 체포 되었습니다. 이 때 박왕열이 김춘수를 공범으로 지목했고 빼도박도 못한 김춘수는 그제서야 사건의 내막을 이야기합니다.
사건의 원인
박왕열이 피해자들을 죽인 동기는 돈이었습니다. 피해자들은 한국에서 불법 투자 사기로 약 150억 정도를 횡령한 뒤 필리핀으로 도망온 범죄자 들이었는데 이를 박왕열이 도와줬습니다. 그 대가로 카지노에 돈을 투자할 것을 제안하고 피해자들은 7억을 투자합니다. 그런데 이후 금액에 대한 수익금을 요구했는데 수익을 분배할 생각이 없었던 박왕열이 그들을 살해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체포 그리고 도망
혼자서는 3명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그는 김춘수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 대가로 1억을 지불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김춘수는 사체 유기 및 강도 살인 혐의로 30년 형을 선고 받고 박왕열은 2016년 필리핀의 외국인 보호소에 구금되어 조사를 받습니다. 그런데 구금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탈옥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현지 언론은 난리가 났고 박왕열이 혼자만의 힘으로 불가능하니 부패핸 경찰이나 숨은 조력자가 탈옥을 도왔다며 분노했습니다.
그렇게 도주에 성공한 박왕열은 잡히지 않은채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중 2019년 텔레그램의 불법 유통 채널에서 새로운 큰 손이 등장했습니다. 이 체널을 통해 무려 300억원에 달하는 불법 약물들을 유통했는데 경찰이 조사해보니 그가 바로 박왕열이였습니다. 그렇게 체포된 그는 필리핀에서 60년 형을 선고 받게 됩니다.
여전히 VIP 박왕열
그러나 필리핀 현지에서는 그가 죄를 지을 만큼 벌을 받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수감되어 있는 필리핀 수도 마닐라 외곽의 뉴 빌리비드 교도소는 일반적인 감옥과는 다릅니다. 제소자들이 교도소 내에서 물건을 사고 팔거나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어 마치 콘크리트에 둘러싸여 고립된 범죄자 마을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돈만 많으면 사회에서 동일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는 곳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