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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물탱크 주부 살인 사건 

2002년 6월 5일, 충북 청주시 흥덕구의 한 다세대 주택에서 강씨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아들 송군이 집에 돌아왔을 때, 집안은 난장판이었고 어머니 강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2002년 실종된 강정숙

집안은 전화선이 뽑혀 있고 부엌에는 저녁 준비 도중인 재료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강씨의 가족들은 강씨의 실종을 걱정하며 기다렸으나, 강씨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실종 23일째 되던 날, 강씨의 시신은 건물 옥상 물탱크실에서 심하게 부패된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숨겨진 진실: 범인의 동기와 용의자

2-1. CCTV에 찍힌 용의자

강씨의 카드가 사용된 은행의 CCTV에는 20대에서 3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 강씨의 카드를 사용하여 현금을 인출하는 장면이 찍혔습니다.

cctv에 찍힌 범인의 모

이 남성은 작은 키에 다부진 몸매를 가졌고, 모자를 쓰고 큰 코가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상을 통해서는 범인의 신원을 확실히 알 수 없었고, 범인의 얼굴이 흐릿하게 찍혀 있어 경찰은 이를 통해 범인을 특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2-2. 가족이 범인 아니야??

사실 초기에는 경찰은 처음에 강씨의 남편 송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습니다.

우선 강씨의 카드 비밀번호를 알고 있기도 했고, 90%이상 아는 사람의 범행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송씨는 사건 당시 알리바이가 입증되었고, 그는 교통사고로 인한 중증 지체 장애를 가지고 있어 범행을 저지르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아들 송군과 딸 송양 역시 사건 당시 학교에 있었으며, 어머니 실종을 처음 발견하고 신고한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알리바이가 확실하여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미궁 속으로: 범인을 왜 잡지 못했는가?

경찰이 범인을 잡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사건 초기 경찰은 강씨의 실종을 단순 가출로 판단하며 초동 수사에 실패했습니다. 강씨의 핸드폰이 청주 시내를 돌아다닌 흔적과 은행에서의 현금 인출 기록을 무시한 채, 중요한 단서를 놓쳤습니다. 또한, 물탱크까지 가는 경로에 대한 CCTV가 없거나 작동하지 않아 범인의 이동 경로를 추적할 수 없었습니다. 초기 수사에서 놓친 증거들이 사건 해결에 큰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미제로 남은 사건의 진행

강씨 살인 사건은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습니다. 2011년, 강씨의 딸이 재수사를 요청하여 청주 흥덕 경찰서가 재수사를 시작했으나, 여전히 진전은 없는 상태입니다. 2021년에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이 19년 만에 CCTV에 찍힌 용의자의 얼굴을 공개하며,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습니다. 흐릿하게나마 남아 있는 CCTV 속 용의자의 얼굴이 언젠가는 진범을 찾는 단서가 되기를 바라는 가족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경찰의 초기 수사 실패와 증거 부족으로 인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지만, 가족들은 여전히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강씨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고 범인이 잡히는 날이 오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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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수호자, 비극의 희생양 세스닉 수녀

1969년 11월 7일,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서 캐서린 세스닉 수녀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녀는 키어 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 중이었으며, 선물을 사러 외출했다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피해자 세스닉 수녀

두 달 후인 1970년 1월 3일, 사냥을 나온 한 가족에 의해 세스닉 수녀의 시신이 외딴 숲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부검 결과, 그녀는 두개골 골절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당시 경찰은 여러 명의 용의자를 조사했으나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해 사건은 미제로 남았습니다.

 

범인은 누구?

세스닉 수녀의 죽음과 관련하여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조셉 매스컬쳐 신부였습니다. 

 1. 여러 수녀들의 증언

여러 피해자들은 조셉 신부가 자신들을 성폭행하고 협박했다고 증언했습니다.

한 피해자는 고해성사에서 친족 성폭행 사실을 고백한 이후 그것을 빌미로 조셉 신부의 타겟이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2. 시신 목격

한 졸업생은 세스닉 수녀가 실종된 후 조셉 신부가 자신을 차에 태우고 세스닉 수녀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고 증언했습니다.

조셉 신부는 이 시신을 가리키며 "이 사실을 발설할 경우 너도 이렇게 될거다." 라는 협박도 했다고 합니다.

 

3. 수상한 방문 기록

세스닉 수녀가 실종되기 전날, 조셉 신부와 매그너스 신부가 캐리지 하우스를 무작정 방문한 기록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세스닉 수녀의 실종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높였습니다.

 

신부가 체포되지 않았던 이유

그렇다면 이렇게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았는데 왜 체포되지 않았던 것일까요??

 

1. 물리적 증거 부족

위에서 언급된 것은 말그대로 정황증거일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사건 발생 후 두 달이 지나 시신이 발견되어 물리적 증거 확보가 어려웠고 이는 법적으로 유죄를 입증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2.신부의 강력한 영향력

당시 조셉신부는 경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동생이 경찰 소장으로 재직 중이었기 때문에 수사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죠...

또한 가톨릭 교회의 강력한 권위와 신부의 사회적 압박은 수사와 기소를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거기에다 사건 당시 피해자들은 공식 석상에서 이러한 신부의 범죄 정황을 증언하기를 매우 두려워 해서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고 합니다.

 

침묵의 대가

볼티모어 대교구는 조셉 매스컬쳐 신부의 성범죄 혐의와 관련하여 피해자들에게 합의금을 지급했습니다.

조셉신부의 범죄 사실이 공식화 된 것은 아니지만 뒤로 들은 피해자들의 이야기들이 너무 일관성이 있고 신빙성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도의적 책임을 느낀 대교구에서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지급했을 수도 있지만 당시 카톨릭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이 사건을 최대한 조용히 덮고 넘어가려고 지불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 : 사건 그 이후

세스닉 수녀 살인 사건은 2017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천사들의 증언"을 통해 다시 조명을 받았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담아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는 노력을 다루고 있습니다.

조셉 매스컬쳐 신부는 2001년에 뇌졸중으로 사망했으며, 사건은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습니다. 세스닉 수녀의 죽음은 많은 의문을 남긴 채,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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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980년대 후반 일본을 공포에 몰아넣은 '오타쿠 살인마' 미야자키 츠토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미야자키 츠토무의 유년기

미야자키 츠토무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성장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숙아로 태어나 희귀병인 '선천성 요척골 유합증'이라는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뉴스에 나온 츠토무의 면상

이는 요골과 척골이 붙어있는데 쉽게말해 손바닥을 뒤집을 수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학창시절에는 동급생으로 부터 왕따를 당했고, 취업을 해서는 직장 동료들로부터 끊임없는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미야자키는 점점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되었고, 애니메이션과 만화에 심취하게 되면서 오타쿠로 변모했습니다.

 

범죄자가 된 계기 - 친할아버지의 죽음

미야자키 츠토무가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유일하게 믿고 따르던 할아버지의 죽음이었습니다. 1988년, 그의 할아버지가 사망하자 미야자키는 깊은 상실감에 빠졌습니다.

할아버지는 미야자키에게 유일한 정신적 지주이자 정서적 지원을 제공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미야자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우연히 만난 어린 소녀에게서 위로를 받았고, 이 경험이 그에게 왜곡된 집착을 심어주었습니다. 이후 그는 어린 소녀들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으며, 이는 연쇄 살인으로 이어졌습니다.

 

잔혹한 범죄들

1988년부터 미야자키는 어린 소녀들을 납치하고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은 그의 주요 범죄들입니다.

 

1. 첫 번째 범죄

1988년 8월 22일, 사이타마현에서 네 살배기 소녀 곤노 마리를 납치하여 하치오지시의 숲으로 끌고 가 살해했습니다. 이후 시신을 성폭행하고 그 과정을 비디오로 촬영했습니다. 시신의 일부를 절단하여 보관하고 나머지는 화장 후 유기했습니다.

 

2. 두 번째 범죄

 1988년 10월 3일, 초등학교 1학년 여아를 납치하여 숲으로 끌고 가 살해한 후 성폭행했습니다. 이 사건에서도 미야자키는 시신을 유기했습니다.

 

3. 세 번째 범죄

 1988년 12월 9일, 네 살배기 여아를 납치하여 성폭행하고 살해했습니다. 그는 시신을 유린하면서 그 과정을 비디오로 기록했습니다. 이후 피해자의 가족에게 엽서를 보내며 자신의 범행을 과시했습니다.

 

4. 네 번째 범죄

1989년 6월 6일, 도쿄도 고토구 아리아케 테니스 공원 근처에서 다섯 살배기 여아를 납치하여 살해했습니다. 그는 시신을 유린하고 비디오로 촬영했습니다. 경찰에 체포된 후 미야자키는 시신의 일부를 먹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허위 진술로 밝혀졌습니다.

 

드디어 잡힌 악마 오타쿠

경찰의 수사는 초기에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89년, 미야자키가 또 다른 어린 소녀를 성추행하는 현장에서 붙잡히면서 그의 범죄 행각이 드러났습니다. 경찰은 그의 집에서 수천 개의 비디오 테이프와 범죄를 증명하는 자료들을 발견했습니다.

 

미야자키의 재판은 그의 정신 상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는 다중 인격을 주장하며 자신의 행위를 부인했지만, 심리학자들은 그가 자신의 행위를 인지하고 있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미야자키는 1997년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이는 여러 차례의 항소 끝에 확정되었습니다.

 

사건 그 이후 

1. 가해자 가문의 박살

일본은 이런 극악범죄가 나오면 범죄자 뿐 아니라 범죄자 가족까지 괴롭히는 것이 심각했습니다.

츠토무의 아버지는 아들의 체포 이후 한번도 재판에 나오지 않았으며, 변호인을 구해달라는 아들의 부탁도 거절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국선변호사를 쓰게 되었는데 이는 국민의 세금이라며 일본 언론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물론 사선변호인을 썼으면 썼다고 비난을 받았을 듯합니다.

 재판이후 츠토무의 아버지는 동생과 딸들을 위해 이혼하여 자녀들이 외가 성을 따르도록 하고, 1994년 11월 20일

피해자들의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집과 재산을 매각하고 타마가와 강 다리에서 투신했습니다.

 

나머지 가족들도 이미 신상이 노출되어 다니던 직장 및 대학교를 그만두게 되었고, 결혼 예정이 되어있던 여동생들은

스스로 파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억울하게 츠토무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나, 생긴게 범죄자와 비슷했던 사람들도 피해를 입었다고 하네요.

 

2. 오타쿠 이미지 나락

'오타쿠 살인마' 사건은 일본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안그래도 좋은 시선이 아니었던 애니를 보는 사람들 즉, 오타쿠 문화에 대한 두려움과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는 애니메이션과 만화 애호가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일본 문학에도 영향을 미쳐 여러 소설의 영감이 되었습니다. 미야자키의 범죄 행위는 인간의 어두운 면모와 사회적 소외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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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황동 엠블렘

2013년 1월 21일, 독일 하노버에 위치한 유명 과자 제조업체 발센(Bahlsen Gmbh) 본사에서 황동 재질의 엠블렘이 도난당했습니다. 이 엠블렘은 금으로 도금된 비스킷 모양의 항동 재질로, 본사 외부에 100년 동안 걸려있던 상징물이었습니다. 사건 초기에는 엠블렘이 사라진 지 며칠 후에야 직원들이 알아차렸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발센 측은 이 엠블렘이 사라진 줄 몰랐다가 직원의 발견으로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발센은 발칵 뒤집혔고, 회사의 사장은 범인을 잡아오는 사람에게 1,000 유로의 현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쿠키 몬스터 탈을 쓴 범인

범인이 보낸 편지와 사진

1월 28일, 독일 각 신문사와 과자 회사에는 의문의 우편이 배달되었습니다. 우편에는 쿠키 몬스터 인형 옷을 입은 사람이 엠블렘을 먹는 포즈로 찍은 사진과 함께 협박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범인은 자신을 세서미 스트리트의 캐릭터 쿠키 몬스터라 자칭하며, 발센이 어린이 병원에 쿠키를 선물하고, 동물 보호소에 현상금을 기부하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쿠키 몬스터 절도 사건'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사건의 결말과 그 여파

엠블럼의 귀환

발센은 범인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정하고, 범인은 엠블렘을 라이프니츠 대학교 내 말(馬) 동상의 목에 걸어놓았습니다.

돌려받은 엠블럼

경찰은 엠블렘에서 범인의 단서를 찾기 위해 조사했지만, DNA나 지문 같은 어떤 단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엠블럼은 진품으로 확인되었고, 다시 발센으로 돌아왔습니다. 발센은 약속대로 52,000개의 쿠키를 어린이들에게 기부했습니다.

 

 

미스테리로 남은 사건: 자작극 가능성

이 사건이 커지면서 일부에서는 발센의 자작극일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발센은 이 사건으로 큰 홍보 효과를 얻었고, 일부 사람들은 이것이 고도의 마케팅 전략일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발센의 회장은 수사가 종결된 후에도 엠블럼을 원래 자리 대신 안전한 곳에 보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쿠키 몬스터와의 인터뷰: 정체는 여전히 미궁

독일의 한 방송국은 쿠키 몬스터와의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그는 전신을 가린 상태로 인터뷰에 응해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사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그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결국, 쿠키 몬스터 절도 사건은 미해결 사건으로 남아, 많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경찰의 태도와 사건의 여파

경찰은 사건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범인을 잡으려 하지 않았고, 엠블럼이 무사히 돌아온 후 수사를 중단했습니다. 이로 인해 경찰도 이 사건으로 인한 손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발센은 이번 사건을 통해 큰 홍보 효과를 얻었고, 사건 자체는 웃음과 훈훈한 마무리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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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3월,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에서 글리코의 사장인 에자키 글리코가 총으로 무장한 괴한들에게 납치됩니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글리코라는 대기업 사장의 납치 사건으로 인해 더욱 주목받았습니다.

 

사건의 구성 

1. 납치 사건의 발생

우선 범인들은, 에자키 글리코의 집에 침입해 그의 아내와 딸을 묶어두고, 욕실에서 목욕 중이던 에자키 글리코를 납치했습니다. 아내는 괴한들이 떠난 후 간신히 줄을 풀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2. 범인들의 몸값 요구 

납치 후, 범인들은 글리코 본사로 전화를 걸어 현금 10억 엔과 금괴 100kg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글리코 측은 경찰에 협조하여 범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협박범들의 통화와 요구를 면밀히 분석하고 대응 전략을 세웠습니다.

 

3. 에자키 글리코의 탈출

납치된 지 약 3일 후인 3월 21일, 에자키 글리코는 오사카부 세치시에 위치한 한 오두막에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범인들이 감시를 소홀히 한 틈을 타 에자키 글리코는 스스로 탈출하여 근처의 역으로 도망쳤습니다. 역에서 그는 일본 국유철도 직원에게 발견되어 경찰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협박과 방화, 이어지는 위협

납치 사건 이후, 글리코 본사에 협박장이 도착했습니다. 범인들은 현금 6천만 엔을 요구하며, 지정된 장소에서 경찰의 잠복 작전을 피해 도주했습니다. 그 후, 글리코 본사와 영양식품 창고에 방화 사건이 발생하며, 사회적 불안이 극도로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단순한 납치나 협박 이상의 조직적 범죄임을 시사했습니다.

 

협박의 확대

범인들의 협박은 글리코 본사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루다이 식품, 하우스 식품 등 여러 대기업이 연달아 협박을 받으며, 일본 식품 산업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범인들은 청산가리를 제품에 넣었다는 협박장을 보내며 소비자들의 공포를 조장했고, 실제로 오사카와 교토의 슈퍼마켓에서 독극물이 든 제품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범인들의 목적은 도대체 뭐야?

범인들의 목적이 명확하게 돈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협박장과 요구 사항들이 단순히 금전적인 이익을 얻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추측 범인의 몽타

예를 들어, 10억 엔과 금괴 100kg을 요구한 것은 현실적으로 이동과 도주가 어려운 금액과 무게였습니다. 또한, 범인들은 여러 차례 협박과 방화를 통해 기업을 위협했지만, 실제로 큰 금액을 손에 넣지 못했습니다. 이는 범인들의 목적이 돈보다는 기업과 사회에 혼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경찰은 도대체 뭘하나??

경찰들이 이렇게 큰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범인들의 치밀함

범인들은 매우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했습니다. 여러 차례 장소를 변경하며 경찰을 따돌렸고, 녹음된 목소리와 가짜 지시문 등을 사용해 경찰의 수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2. 경찰의 실수와 자원 부족

경찰은 몇 차례 범인을 체포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목격된 용의자를 체포하지 못한 이유는 상부의 지시 부족과 현장에서의 실수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여러 차례 수사를 벌였지만 범인을 잡지 못하는 과정에서 자원과 인력이 부족해졌습니다.

 

3. 사회적 압박과 혼란

사건이 장기화되면서 사회적 불안과 압박이 높아졌습니다. 경찰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지만, 범인들은 이를 이용해 더욱 교묘한 방법으로 경찰을 따돌렸습니다.

 

결과적으로, 글리코 모리나가 사건은 일본 경찰 역사상 가장 큰 미해결 사건 중 하나로 남아 있으며, 범인들의 정체와 목적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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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여대생 사망 사건

1998년 10월 16일, 대구의 한 대학에 재학 중이던 정은희 양은 학교 축제 기간 동안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밤 10시 30분쯤, 피곤해하는 남자친구 피군을 배웅하며 캠퍼스 교문을 함께 나섰습니다. 그러나 약 30분 후, 피군은 병원 앞에서 홀로 깨어났습니다.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피군은 은희 양에게 연락을 시도했으나 응답이 없었고, 그녀가 혼자 집에 갔을 것이라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의문의 교통사고와 답답한 경찰의 초동 수사

다음날 새벽 5시 10분경, 대구 달서경찰서에 한 화물 트럭 운전자로부터 교통사고 사망 신고가 접수되었습니다. 화물 트럭 운전자 최씨는 한 여성이 고속도로 중앙 분리대를 넘어 무단횡단을 하다가 트럭에 치여 사망했다고 신고했고, 그 여성은 바로 정은희 양이었습니다. 경찰은 이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규정하고 수사를 종결했으나, 유가족은 경찰의 미흡한 수사에 의문을 제기하며 재수사를 요청했습니다. 정은희 양이 사망한 고속도로는 그녀의 평소 생활 반경과 거리가 멀었으며, 사고 당시 술에 심하게 취해 있지도 않았습니다.

 

유가족의 의문과 발견된 증거

유가족은 은희 양의 사망 경위에 대해 많은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특히 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은희 양의 속옷은 성폭행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속옷이 은희 양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유가족은 경찰의 부실한 수사를 비판하며, 속옷에 대한 국가수 감정을 요청했습니다. 이후 경찰은 사건을 교통사고로 서둘러 종결했으나, 유가족은 지속적으로 재수사를 요구하며 60여 차례의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2013년, 검찰은 정은희 양의 속옷에서 스리랑카 남성 케인의 DNA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5년만에 잡힌 용의자 케

검찰의 재수사에 따르면, 사건 당일 케인과 그의 동료들은 술에 취한 정은이 양과 피군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자전거에 정은이 양을 태우고, 고속도로 아래 굴다리 근처로 끌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케인과 그의 동료들은 피해자를 집단 성폭행했고, 현금과 학생증을 빼앗은 후 현장을 떠났습니다. 겁에 질린 은희 양은 고속도로로 향해 도움을 청하려 했으나, 중앙 분리대를 넘다가 트럭에 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피해 재연

남자친구는 뭐했나..?? 

남자친구 피군은 사건 당일 정은이 양과 함께 있었으나, 병원 앞에서 홀로 깨어난 이후 여자친구의 행방을 알지 못했습니다. 피군은 당시의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고 진술했으며, 경찰 조사에서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검찰은 결국 케인을 스리랑카로 추방시키고, 스리랑카 법원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했습니다.

스리랑카에서의 강간죄 공소시효가 20년이기 때문에, 검찰은 신속하게 사법 공조를 통해 케인을 기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정은이 양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많은 의문을 남기고 있습니다. 유가족은 정은희 양의 사망 경위와 관련하여 여러 의혹을 품고 있으며, 경찰의 초기 수사 실패와 허위 진술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유가족과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아쉬움과 분노를 남기며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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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형살인마 이치하시 타치아시

이치하시 타치아시는 일본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성형 살인마로, 그의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도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평탄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성인이 된 후 우울증을 겪으며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으로 생활했습니다.

그의 범행과 그 이후의 도피 생활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으며, 극적인 도피 방법과 그로 인한 논란이 이어졌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치하시 타치아이의 범행과 도피,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다뤄보겠습니다.

 

이치하시이 범행과 범행 동기

2007년 3월 25일, 22살의 영국인 여성 린제이 앤 호커가 실종되었고, 그녀는 일본 치바현 후나바시시에서 어학원 영어 교수로 근무 중이었습니다. 이치하시는 뒤틀린 욕망으로 인해 호커를 자신의 아파트로 유인한 후 폭행하고 성폭행했습니다.

호커가 도망치려 하자, 그녀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살해하였습니다.

그의 방에서는 호커의 시신이 모래로 덮여 있었고, 그의 DNA와 일치하는 혈흔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치하시는 재판에서 살해할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했으나, 검찰 측은 계획적인 범행으로 간주했습니다.

이치하시와 피해자의 가

기이한 도피 방법

사실 이 사건이 유명해진 것은 바로 그의 기이한 도피방법때문입니다.

 

1.  성형 수술 

 기본적으로 여러차례 성형수술을 진행했는데, 도망자의 신분으로 성형을 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는  신분증 없이 수술을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찾아 정식으로 코 성형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더 이상 수술을 받을 수 있는 병원이 없을 때는 편의점에서 구입한 재봉 도구로 스스로 코를 꿰매고 입술을 자르는 등,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꾸었습니다.

 

2. 무인도 생활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오키나와의 무인도로 도피하여, 낚시와 독사 사냥 등으로 자급자족 생활을 했습니다.

 

3. 다양한 도피경로

사이타마, 이바라키, 군마현 등을 거쳐 이동하며, 무임승차와 도보를 통해 경찰의 추적을 피했습니다. 도피 생활 중 건설 현장에서 일하며 가짜 신분으로 살아갔습니다. 또한 최대한 CCTV를 피하고, 사람들과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이를 통해 경찰과 대중의 눈을 피하며 도피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결국 잡힌 이치하시

2009년 11월 12일, 오사카의 페리 터미널에서 이치하시는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도피 생활 2년 7개월 만에 체포된 그는 자신의 도피 생활에 대해 책을 출간하며, 수익금을 유가족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유가족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체포 당시에도 일부 사람들은 이치하시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팬클럽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의 극적인 도피와 체포 과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피해자의 가족들

 

2012년 4월 25일, 이치하시는 최종적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일본은 사형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의 범행은 특별히 극악무도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아 무기징역이 선고되었습니다. 현재 45세인 그는 나가노 교도소에서 복역 중입니다. 이 사건은 성형 수술로 얼굴과 신분을 바꾸며 무인도에서 숨어 지낸 범죄자의 이야기로, 영화 같은 현실을 보여준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치하시의 도피 생활과 그로 인한 논란은 일본 사회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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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이비 종교 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태양의 사원'은 그 끔찍한 결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이비 종교는 1990년대에 여러 국가에서 집단 자살과 살인 사건을 일으키며 세상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번 블로그 포스트에서는 태양의 사원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들의 활동과 비극적인 결말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태양의 사원 마

신비로운 시작: 태양의 사원 탄생

태양의 사원은 1984년 스위스에서 조제프 디 맘브로와 뤽 주레라는 두 사람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이들은 고대 기사단과 신비주의적 교리를 결합하여 새로운 종교를 창설했으며, 초기에는 스위스, 프랑스, 캐나다 등지에서 신도들을 모집했습니다. 이들은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며, 자신들만의 독특한 의식을 통해 신도들의 충성을 요구했습니다.

 

매혹의 이유: 사람들은 왜 빠졌나

태양의 사원은 종말론적 예언과 영적 계몽을 약속하며 많은 사람들을 유혹했습니다. 신도들은 지도자들의 카리스마와 설득력 있는 설교에 매료되어 종교에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뤽은 외모도 훤칠해 사람들이 꽤 모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 공동체 내에서 특별한 목적과 소속감을 느꼈으며, 외부 세계와의 단절로 인해 조직 내에서만 정보를 교환했습니다. 이는 조직의 통제와 세뇌를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충격의 사건: 집단 자살과 살인

1994년, 스위스와 캐나다에서 동시에 발생한 집단 자살 사건으로 53명의 신도들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이들은 불타는 건물에서 발견되었으며, 일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반면 다수는 타살로 확인되었습니다.

(10명에겐 비닐봉지가 씌워져 있었고, 몇몇은 머리에 총상이 있었으며 체내에서 마약성 진정제가 검출되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태양의 사원의 잔혹한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이후 1995년과 1997년에도 추가적인 집단 자살 사건이 발생하며, 태양의 사원과 관련된 비극이 계속되었습니다.

 

끝없는 비극: 반복된 비참한 결말

태양의 사원은 신도들에게 종말론적 믿음을 주입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했습니다. 이들은 지구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으며, 자신들이 영적 계몽을 통해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러한 세뇌와 통제는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목숨을 끊거나, 타인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태양의 사원 사건은 사이비 종교의 위험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이 사건은 종교적 광신과 지도자들의 사리사욕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경고합니다. 사이비 종교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지속적으로 경계하고 교육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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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의 신비전!?

인체의 신비전은 독일의 해부학자 군터 폰 하겐스가 만든 전시회로, 실제 인간의 시신을 사용한 해부학적 전시입니다. 이 전시회는 1995년 일본에서 처음 열린 "바디 월드" 전시를 시작으로 전 세계를 순회하며 개최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열렸던 이 전시회는 과학적이고 교육적인 목적으로 기획되었으며, 실제로 죽은 사람의 신체를 전시물로 사용하여 인체의 내부 구조와 기능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하지만 중국의 경우 다릅니다!

중국에서 온 시신의 경우 출처가 명확하지 않아 윤리적 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미국 뉴욕주 검찰은 전시회의 시신이 중국의 수감자나 사형수의 시신일 가능성을 조사하기도 했습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하게 알려졌고 논란이 많은 것이 바로 중국의 인기 아나운서 장웨이제 실종입니다.

 

장웨이제의 실종

장웨이제는 중국의 인기 아나운서로, 당시 다롄시 시장이었던 보시라이와 내연 관계에 있었습니다.

보시라이가 시진핑 주석이 되기 전, 중앙 정치에서 밀려나면서 인민들의 힘을 이용해 다시 복귀하려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장웨이제는 보시라이와 결혼할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시라이는 중앙 정치에 복귀하는 데 성공한 후, 장웨이제와의 관계를 끝내기로 결심합니다. 이로 인해 장웨이제는 임신 8개월 차에 실종되었고, 이후로는 누구도 그녀를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실종된 그녀는 인체신비전에!??

2012년, 사람들은 인체 신비전에 전시된 임산부의 시신이 장웨이제일 것이라는 충격적인 주장을 제기했습니다.

인체 신비전에 사용된 신체의 약 80%가 중국에서 온 것이었고, 신체의 출처는 대부분 불분명했습니다.

특히, 장웨이제가 실종될 당시 임신 8개월 차였던 점과 인체 신비전에 전시된 임산부의 시신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의심은 더욱 커졌습니다. 또한, 인체 신비전 표본 공장의 책임자가 보시라이의 아내 구카이라이였다는 사실도 밝혀지면서 음모론은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음모론의 증거

인체 신비전에 전시된 임산부의 신체는 장웨이제와 키, 발 사이즈, 얼굴 특징까지 일치했습니다. 또한, 중국에서 임산부의 사형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신체가 기증될 가능성은 매우 낮았습니다.

심지어 장웨이제의 실종을 취재하던 미국 방송사에는 중국 남성 순더 창이 자신이 인체 표본 공장에 납품하는 일을 했으며, 그곳에서 장웨이제의 시신을 보았다는 제보까지 들어왔습니다.

이에 군터 폰 하겐스는 중국인 신체가 맞지만, 누구인지는 밝힐 수 없다고 말해 논란은 계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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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노크 섬의 발견과 식민지 건설!

 

1584년 영국의 월터 롤리가 로노크 섬을 발견하고, 이를 식민지로 삼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당시 엘리자베스 1세의 허락을 받아 식민지를 설립하려던 롤리는 원정대를 파견했고, 원정대는 로노크 섬에 무사히 도착합니다. 현지 인디언과의 물물교환을 통해 친근한 관계를 맺었으나, 때로는 약탈도 일삼았습니다.

 

식민지 개척 실패와 재방문!

 

1587년, 롤리는 115명의 남성, 여성, 어린이로 구성된 새로운 개척민들을 이끌고 다시 로노크 섬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을 이끈 것은 존 화이트라는 롤리의 친구였습니다. 존 화이트는 이전 탐사대가 실패한 이유가 원주민과의 갈등 때문이라 판단하고, 원주민들에게 우호적으로 대했습니다. 선물도 나눠주며 원주민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했지만, 식량 부족과 척박한 땅은 개척민들의 생존을 위협했습니다.

결국 개척민들은 존 화이트에게 영국으로 돌아가 도움을 청하라고 요구했고, 존 화이트는 보급 물자를 얻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원주민들의 증발!! - 영국에 갔다 오니 모두가 사라졌다.

존 화이트가 영국으로 돌아간 후, 여러 차질로 인해 다시 로노크 섬으로 돌아가는 데 3년이 걸렸습니다.

1590년, 존 화이트는 드디어 로노크 섬에 도착했으나, 개척민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전투의 흔적도, 해골도 없었습니다.

유일한 단서는 "Croatoan"이라는 글자가 나무에 새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화이트가 개척민들에게 만약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면 행선지를 기록하라고 당부한 내용과 일치했으나, 행선지에 대한 정보는 더 이상 얻을 수 없었습니다.

 

증발의 가설

1. 파우아탄 족의 공격

이 가설은 파우아탄 족 족장이 "우리 동맹의 참여를 거부한 체서픽 족이라는 부족과 함께 살고 있길래 우리가 전부 없애 버렸다"라는 말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증거 부족과 당시에 해골이나 피의 흔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낮습니다.

 

2. 스페인의 공격

당시 전쟁 중이던 스페인이 로노크 식민지를 파괴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스페인은 프랑스의 식민지를 파괴한 전적이 있었지만, 1600년대에 영국 식민지를 찾아다녔다는 기록이 없어 이 가설도 사장되었습니다.

 

3. 해상 조난

가장 유력한 가설은 개척민들이 해상 조난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섬에는 흔적도 뼈도 없었기 때문에, 섬에 남은 주민들이 영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체적으로 항해에 나섰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실제로 존 화이트가 로노크를 떠날 때 소형 선박을 남겨 놓았기 때문에 이 가설이 가장 말이 됩니다.

하지만 왜 물건들을 남겨 놓고 갔는지, 나무에 새겨진 "Croatoan"이라는 글자의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로노크 섬 주민 증발 사건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사라진 식민지로 불리며 미국에서는 꾸준히 연구가 진행 중이지만,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역사 속 가장 미스터리한 사건 중 하나로 남아 있으며,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끌 것으로 보입니다. 로노크 섬 사건에 대한 다양한 가설과 연구는 계속되고 있으며, 언젠가 이 미스터리가 풀릴 날이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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