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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시체인 좀비를 소재로 많은 매체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좀비가 과거에 영화 속이 아닌 아이티라는 나라에 실존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좀비 탄생의 배경

우선 좀비가 나왔던 당시 상황에 대해서 이해가 필요합니다. 좀비가 나왔던 시기는 17세기인데 이 시기에는 한창 흑인 노예가 성행했던 시기입니다. 당시 흑인 노예가 얼마나 유행했고 심했는지는 이전 흑인 노예 포스팅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노예들의 노동의 강도는 너무 강하고 처우는 벌레보다 못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 노예들의 유일한 안식처는 부두교라는 종교였습니다. 부두교라는 것은 아프리카 전통 종교와 가톨릭이 섞인 형태의 종교였는데 주술을 부릴 수 있는 사제가 있다는 것이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특히 부두술을 통해 죽은 자를 되살려서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한편 노예들을 관리하는 백인 농장주 입장에서는 더욱더 많은 흑인노예들을 필요했지만 동시에 많은 노예들이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어쩌나 하는 고민의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백인 노예들의 관심에 들어왔던 것이 이 죽은 자를 되살린다는 부두술 이었습니다.

 

좀비의 탄생

이러한 상황 속에 부두교의 사제는 백인들의 좀비 노예를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말 사제들이 장례식까지 마친 시체를 무덤에서 꺼낸 다음 주술을 마치니 시체가 일어섰고 그 좀비는 백인노예들에게 거래까지 되었습니다.

아이티 좀비

그래서 아이티 인들은 가족이 죽으면 시신을 매장한 후에도 36시간 넘게 지켜보거나 고인이 죽어 다시 살아나면 사제를 공격할 수 있도록 칼을 쥐어주고 매장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좀비를 만드는 것이 정말 가능한 걸까요? 물론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실체는 좀비보다 더욱 끔찍했습니다. 부두교의 주술사들은 죽은자에게 어떤 주술을 부린것이 아니라 오히려 산 사람들에게 약물을 넣어 시체처럼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신경에 엄청난 혼란을 주는 테트로도톡신이라는 물질을 이용해 사람을 가짜 죽음상태 즉 가사상태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본 주변사람들은 장례식을 치르고 부두교의 사제는 이 시체를 다시 무덤에서 꺼냅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피해자에게 마취성 독소가 포함된 약을 2차로 먹이고 뇌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며 노예로써 일만 하도록 세뇌시키는 말을 대뇌입니다. 예를 들어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일을 해야한다와 같은 말을 세뇌시킨거죠. 그렇게 충실한 노예가 될때까지 세뇌와 약물을 주입한 후 백인 농장주에게 판매가 되고 농장주 입장에서도 반란의 걱정이 없는 흑인 좀비를 환영했습니다.

이렇게 끔찍한 짓을 당한 흑인 노예는 평생을 죽음보다 못한 상태로 평생을 주인의 일을 하며 살아야했습니다.

 

아이티의 독립과 현 상황

이러한 끔찍한 상황을 더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흑인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1804년 아이티 공화국이란 이름으로 독립했습니다.

이는 노예들이 해방을 쟁취하고 국가를 세운 대단한 역사지만 노예제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던 서양입장에서는 아이티 공화국 존재 자체로 위협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티 공화국은 철저히 따돌림을 당하며 외교적으로 고립되었습니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아이티는 국가로 인정해주고 외교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으로 식민지를 행했던 프랑스에 1억 5천만 불이라는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합니다. 하지만 이 돈은 당시 아이티가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고 미국에 빚을 지게 됩니다. 이 금액을 갚기위해 120년이란 시간이 걸렸으며 1947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던 아이티는 세계 최빈국이란 타이틀을 받게 됩니다.

 

살아있는 지옥 아이티

현재의 아이티는 그야말로 지옥입니다. 아이티인들은 배가 너무 고파 흙으로 만든 진흙쿠키를 먹고 있습니다. 계속 먹으면 배가 아파올 것을 알지만 너무 배가 고파 먹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인거죠.

진흙 쿠키

게다가 치안은 최악입니다. 대통령마저 갱단에 의해 암살당하고 매일 시내 한복판에서 총성이 오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범죄는 납치인데 외국인, 어린이 가리지 않고 매일 5건이 넘는 납치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남자애들은 총알받이로 쓰이거나 노동에 쓰이고 여자애들은 성폭행에 당하고 매춘부로 팔려나가게 됩니다.

정부 자체가 무너진 상황이라 유엔 평화유지군의 도움에도 한계가 있으며 그야말로 희망이 없는 안타까운 나라가 되어버린 현재의 아이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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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 루주 정권 시절 캄보디아에서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바로 대규모의 학살인데 이를 킬링필드라고 부르며 인류사를 통틀어서도 이정도의 비참한 짓은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입니다.

오늘은 끔찍하고 잔혹했던 그 날의 사건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사건의 배경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은 캄보디아 지역에 많은 베트콩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캄보디아 지역에 일본 본토에 떨어뜨린 폭탄의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의 폭탄을 투하하게 됩니다. 동시에 친미 우익 세력들을 지원해 이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1970년 론 놀이 쿠데타를 일으켜 캄보디아의 권력을 장악합니다. 

 론 놀은 미국의 지원을 받고 권력을 잡았기에 미군에 의해 자국민이 폭격을 막고 죽는 상황에서도 자신들과는 관련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게다가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를 저질러 캄보디아 경제에 심한 타격을 입혀 캄보디아 국민들은 론 놀과 미국을 싫어했습니다. 

 

이때 크메르 루주는 반미 정서를 이용해 평화,평등,공평을 내세우며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크메르 루주는 프랑스어식 표현으로 빨간 크메르를 말하며 빨간색은 공산주의를 상징하고 크메르란 캄보디아 인구10%를 차지하는 캄보디아의 주류 민족을 나타냅니다.)

  크메르 루주는 론 놀의 쿠데타로 쫓겨났던 시아누크 국왕과 손을 잡으며 보수 세력에게도 지지를 받아 세력을 크게 성장시켰습니다. 그렇게 세력이 커진 크메르 루주는 정부군과 내전을 일으킵니다. 다급해진 론 놀은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해   1억 5천만 달러에 달하는 원조금을 받았지만 이미 민심이 넘어가 내전에서 승리하긴 힘들었습니다. 

결국 캄보디아 내전은 정부군이 패배해 1975년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을 크메르 루주가 장악하며, 론 놀은 해외로 도피하며 친미정권은 끝이 나게 됩니다. 

폴포트의 크메르 루주

압도적인 권력을 잡은 폴포트

이때부터 크메르 루주의 폴 포트란 인물이 캄보디아의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폴포트의 본명은 살로르 사르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 상당히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국비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프랑스로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였습니다. 폴포트란 이름은 조국 캄보디아에서 프랑스군의 탄압을 맞서 독립운동 할 때 썼던 예명이며 정확한 유래와 의미는 알려져있지 않지만 'Political potential(정치적 가능성)'의 단어에서 따왔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폴포트의 사진

폴포트는 집권하자마자 론 놀을 따랐던 수하들과 가족들 총 700여 명을 죽인 뒤 그냥 내다 버렸으며, 당시 분열되어 있었던 공산당을 장악한 후 공무원들과 군부 내에서도 대대적인 숙청을 했습니다. 이렇게 폴포트는 압도적인 권력을 잡게 됩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나라를 만든 폴포트

풀포트는 자신의 롤 모델인 마우쩌둥이 주도했던 중국의 대약진운동을 모방하여 과격하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캄보디아를 운영했습니다.  중국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자본주의의 산물인 도시가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없애버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개인의 사유재산 소지를 완전히 불허하는 등 시장 경제 시스템 자체를 없애버리려고 했습니다. 게다가 화폐 제도도 폐지했고 우리나라에 한국은행 정도로 볼 수 있는 프놈펜 중앙은행을 폭탄으로 폭파시켰습니다.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없고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미친짓이었습니다. 

이로써 화폐와 시장 경제가 없어졌기 때문에 모든 물건은 물물 교환 형식으로 얻어야 했고 그마저도 본인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대다수의 필수품들은 국가의 배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중국과 일부 교류를 제외하고는 외국과의 외교도 단절하고 무역도 소멸되었습니다. 또한 신문을 발행하는 것도 금지되어 언론사들도 강제 폐간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결혼과 연애또한 금지당했고 국가가 허락해야지만 가능했습니다. 

앞서 말했듯 도시를 없애버렸기 때문에 도시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강제 귀농을 하게 되었고 국가에서 정해준 할당량을 매일 채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도시에 있었던 사람들은 농업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에 노동력은 많았지만 수확량을 많이 줄어들었으며 수확한 농작물들은 국가에서 무기로 바꾸어 많은 사람들이 기근과 기아에 시달려야했습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 끔찍한 대학살의 시작

이런 미친 상황에 캄보디아 전역에서는 시민들은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무력 저항도 심화되어 내전이 벌어질 상황 치닫습니다. 폴포트는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고 공표하며 저항하는 자국민들을 대상으로 잔인한 정책을 펼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항하는 대상뿐 아니라 자본주의에 빠질 만한 사람들까지 영역을 확대하며 엄청난 사람들이 숙청의 대상이 됩니다. 자본주의의 '자'에 관련되어있으면 모조리 대상이었는데 그 예로 무역관,외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 교사, 의사, 약사, 교수 등 전문적인 직종, 스포츠인, 예술가 등 농민가 노동자를 제외한 모든 직종의 사람들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대학살로 죽어간 사람들

폴포트는 지식인까지도 몰살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지식인인지 판단하는 여부가 매우 주관적이고 황당했습니다. 

일단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처형 대상에 들어갔고 영어를 할 수 있거나 손바닥에 노동의 상징인 굳은살이 없다, 안경을 썼다, 책을 똑바로 들고 있는다 등 정말 어이없는 이유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당시 약 800명 정도의 의사 중 40명만 살아남았고 판사는 545명 중 단 4명만 살아남았습니다. 

 또한 크메르 족을 제외한 소수민족 또한 숙청의 대상이었으며 당시 인구의 15%정도로 많은 소수민족들을 보이는대로 죽였습니다. 

 폴포트는 반동분자의 씨를 말려야한다며 자본주의에 물든 사람들을 체포해와서 잔인하게 죽였으며 체포된 사람의 3대까지 연좌제를 적용했습니다. 처형자의 아내와 형제는 물론 자녀까지도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폴포트의 몰락

폴포트는 극단적인 공산주의였지만 같은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을 극도로 혐오했습니다. 베트남에게 시달렸던 역사때문에 그랬던 것이었죠. 그래서 베트남계 캄보디아인들과 친 베트남 성향의 인사들이 대대적으로 처형했고 1978년에는 베트남을 선제 공격을 하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베트남은 1978년 25만의 병력으로 캄보디아를 침공했고 1979 프놈펜을 점령해 베트남 괴뢰 정부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면서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라 불리는 비극이 끝이나게 됩니다. 

 캄푸치아 정부는 화폐 제도도 복원시키고 학교,병원, 방송국,은행 등을 복구시켰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친중 정권이었던 크메르 루주 정권을 무너뜨린 베트남에 캄보디아의 해방 등을 명분으로 베트남을 공격하면서 중월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때 미국은 크메르 루주가 킬링 피드를 저질렀다는 사실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베트남 전쟁의 치욕을 갚기 위해 크메르 루주를 지원하며 내전이 또 발발하게 되며 수십만의 사람이 죽어나갔습니다.  1989년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고 캄보디아의 자치권을 인정받게 되고 1998년 폴포트가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드디어 크메르 루주는 역사에서 지워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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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리스 황소의 제작 - 역사상 가장 잔혹한 형벌의 등장

중세시대나 그 이전 시대에는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형벌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기원전 6세기 경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는 끔찍한 형벌이 존재했습니다.  

당시 시칠리아 섬에는 아크라가스라는 그리스의 폴리스가 있었는데, 아크라가스의 군주는 전역에서 폭군으로 유명했던 팔라리스였습니다. 팔라리스는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것을 보고 희열을 느낀 인물입니다. 하지만 사이코적 성향과는 다르게 정치적인 능력은 좋아서, 팔라리스의 통치 아래 아크라가스는 상당한 번영을 누렸고, 도시에 물을 공급하거나 훌륭한 건물을 세워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능력좋은 사이코패스였던 그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인물들이나 범죄자를 잔혹하게 죽일 수 있는 도구를 당시 아테네의 뛰어난 과학자이자 조각가였던 페릴라우스에게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때 만들어 진것이 놋쇠로 된 황소모양의 처형 도구였습니다. 완성된 청동 황소는 처형 도구를 만들도록 지시한 팔라리스의 이름을 따서 팔라리스의 황소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팔라리스 황소 모형

팔라리스 황소의 작동 방식

팔라리스 황소는 대상자를 안에 가둔 다음, 황소 아랫부분에 불을 짚혀 황소 안에서 천천히 태워죽이는 방식이었습니다.

소 입부분에는 금관을 만들어 놓았는데, 안에 들어간 사람이 산채로 구워지면서 비명을 지르면, 소 입에 연결된 관이 울리며 황소가 우는 소리 들리게 만들었습니다. 시각적인 부분에서는 직접 불에 태워 죽이는 것보다 덜 잔인해 보일 수 있는데, 당사자의 고통은 팔라리스의 황소가 훨씬 더 끔찍했습니다. 인간이 느끼는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이 불에 탈 때 고통이라고 하는데 팔라리스의 황소를 사용하면 황소 안에 갇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황소가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서서히 익어갑니다. 놋쇠 황소 구조상 열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뜨거워지기 때문에 마치 오븐에 익힌 것처럼 속까지 완전히 익어버리게 됩니다. 아무리 오래 버텨도 10분을 넘기는 경우가 없었다고 하는데, 이 시간 동안 극악의 고통을 겪게 되었다고 합니다.

 

팔라리스 황소로 처형당한 사람들 

팔라리스는 이 처형도구를 매우 만족스러워 했고 특히 비명을 지르면 황소 울음소리가 나오는 것에 희열을 느껴서, 연회를 열 때마다 노새 황소를 가져와 처형 대상자들을 데려와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가장 먼저 팔라리스 황소에 들어가 처형을 당했던 사람이 황소를 만든 펠릴라우스 본인이었습니다.

죄를 짓거나 그런 것은 아니고 페릴라우스는 보상을 받길 원했지만, 팔라리스는 보상을 바라는 페라우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작동이 잘 되는지 실험해본다며 페릴라우스를 처형시켰습니다.

 기원전 570년부터 554년까지 팔라리스는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폭정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사이코패스인 팔라리스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반란군에 의해 팔라리스도 붙잡히게 되고, 결국 자신이 그렇게 즐거워했던 팔라리스의 황소에 들어가서 똑같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사실 이 팔라리스 황소는 진짜가 아니라는 논란도 있습니다. 많은 문헌에서 기록되어 오긴 하지만 최초로 이 내용이 전달된 것은 팔라리스 황소가 만들어 졌다고 알려졌던 시기보다 1세기나 지난 시점이고 시인 핀다르라는 한 사람에 의해서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시대의 다른 고문기구를 보면 완전 허구는 아닐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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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 투하 사건의 배경

일본은 태평양 전쟁과 중일전쟁에서 이미 많은 피해를 입어 미국에 항복하지 않으면 멸망이 확실한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일본 국민들은 매일 굶주림에 시달려 더이상 전쟁을 이어나갈 자원조차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미국의 적국 중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은 이미 1945년 5월에 항복선언을 하였으나 일본만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에 미국은 '1945년 8월 1일까지 항복하면 일절 불문에 붙이겠다'는 전쟁사에 드문 관대한 선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자국민을 재료로 쓰는 카미카제(자살공격) 등 항복을 거부합니다. 결국 미국은 일본인은 완전 소멸 또는 국가 존속이 위협을 받아야 항복한다고 판단하여 핵 투하를 결정하게 됩니다.

 

히로시마 핵폭탄 투하 

1945년 8월 6일 새벽 2시 45분 핵폭탄 리틀 보이를 실은 폭격기 에놀라 게이(ENOLA GAY)는 일본의 히로시마를 향해 투하되었고 히로시마 상공 약 570m 위치에서 폭발했습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후 사진

폭발과 동시에 엄청나게 밝은 빛이 온 도시에 퍼졌고 이 빛으로 인해 실명한 사람도 있었으며 손으로 빛을 가리니 손에 뼈가 보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한 리틀 보이가 터진 곳의 온도는 약 4,000도에 달해 근처의 모든 것을 증발시켰습니다. (참고로 태양의 표면 온도가 약 6,000도 입니다.)

이 때 열로 인해 물체가 타버린 검은 흔적이 남는데 이를 원폭 그림자라고 합니다.

뒤이어 엄청난 충격파로 인해 최대 340m/s에 달하는 엄청난 폭풍이 주변 1.6km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충격파에 이어 폭격 후폭풍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폭격으로 인해 불길이 일어나면 뜨거워진 대기는 상승하고 아래쪽에는 부분적으로 진공상태가 됩니다. 이를 메꾸기 위해 외곽의 찬 공기가 빠르게 덮쳐 오는데 이때 불씨를 합쳐 대규모 화재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상황은 말그대로 지옥 그차체였다고 합니다.

높은 열로 인해 도시 전체가 초고온의 건식 사우나 상태였고 피부가 녹아내린 채 물을 찾는 사람들, 온몸이 불타 다리 밑으로 떨어져 불덩이처럼 산산조각 나는 사람 등 끔찍한 목격담이 넘쳐났습니다.

 

그렇게 리틀 보이가 터진 지 약 30분이 지났을 무렵 하늘에서는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생명체에게 치명적인 방사능 비였지만 사람들은 너무 건조해진 대기 탓에 목마름이 극에 달해 있었고 절대 먹어선 안 되는 이 검은 비를 입을 벌려 받아 먹고 있었습니다.

원폭 피해의 사진

리틀 보이가 터진 지 몇 시간이 지난 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방사능에 노출된 증상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카락이 빠지거나 코와 입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죠. 그리고 입에서는 쇠 맛이 났고 토할 것 같이 엄청나게 메스꺼움도 느꼈습니다. 심한 사람은 백혈병의 증상이 나타나는 사람도 있었죠.

 

하지만 이미 폭발로 인해 히로시마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 90%는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생존자들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신음하고만 있었습니다.

 

리틀보이 핵폭탄이 터진 후

일본은 원폭 투하 다음날인 8월 7일 히로시마에 조사단을 파견하여 그 소식을 전해들었지만 일본 군부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여전히 항복에 대한 모습을 보이기는 커녕 어벙벙한 상태로 그럴 리가 없다며 여전히 미국에 대항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죠.

 

하지만 얼마 안 가 일본도 히로시마에 투하된 폭탄이 원자폭탄이라는 것을 트루먼 대통령의 공식 성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일본 내부에서도 천왕제를 유지한다는 조건만 붙이고 항복하자고 주장하는 화평파와 연합군이 일본을 점령해도 무장해제와 전범 재판은 일본이 직접 할 것이라는 조건이 반드시 붙어야 항복한다는 정신나간 강경파가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복 선언은 계속 지체되었습니다.

 

나가사기 핵폭탄 투하 - 리틀보이보다 강력한 팻맨의 투하

이렇게 항복 선언이 지체되자 미국은 아직 정신을 못차린 일본에게 두번째 폭격을 준비합니다. 1945년 8월 9일 오전 나가사키에 두번째 핵폭탄인 팻맨을 투하했습니다. 사실 애초에 목표는 고쿠라였지만 기상상황이 악화하여 목표지점을 확인 할 수 없어 급하기 나가사키로 변경하여 나가사키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떨어진 팻맨은 리틀보이 보다 훨씬 강력한 폭탄이었지만 피해는 히로시마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그 이유는 비교적 평탄한 지역인 히로시마와 달리 나가사키는 인구도 상대적으로 적고 지형도 산지 지형이라 산과 계곡들이 막아준 덕택에 폭탄의 위력이 반감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가사키의 절반 이상이 팻맨에 의해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리틀보이와 팻맨

원자폭탄 두 방을 연달아 맞은 일본은 더 이상 미국을 상대로 저항이 불가능하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되었고 한 발밖에 없는 줄 알았던 원자폭탄이 연달아 또 터지자 다음 차례는 교토에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결국 무조건 항복하기로 합니다.

 

원자폭탄이 터진 후 반응

일본 작품에서는 미국 장병들이 핵폭탄을 터트린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는 장면이 종종 표현됩니다만 사실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미국은 핵폭탄으로 인해서 전쟁이 끝났다고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또한 당시 일본의 전쟁방식인 반자이 돌격이나 카미카제 등 제 3자의 눈에는 너무 기괴했고 끔찍했습니다. 이러한 자국민을 희생하는 방식이 미국인 입장에서 볼때는 엄청난 반감을 일으켰고 일본이 항복한 것은 나치가 항복한 것과 똑같은 수준의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특히 원폭 투하를 한 폴 티비츠도 2005년 원폭 60주년을 맞아 '원폭은 필요했으며 죄책감이 없다.'며 똑같은 상황이 된다면 똑같이 할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원폭 개발에 종사한 과학자인 해롤드 에그뉴 박사는 일본인 피폭 생존자들이 찾아와 사과를 요구한 적이 있는데 이에 단호하게 '진주만을 잊지 마라' 며 사과를 거부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반응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일본이 핵을 맞지 않을 기회는 최소 2번 이상 있었고 히로시마 원폭 이후에도 빠른 항복을 했다면 나가사키까지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사건 이후에 자신들의 피해만 주장하고 자신들이 선제 공격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으니 미국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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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 - 충무공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 

성웅, 군신 등 어떠한 수식어를 붙혀도 부족한 위인 이순신의 최후의 전투는 노량해전이었습니다. 

노량해전은 음력 1598년 11월 19일 경상우도 남해현의 노량해협에서의 전투였는데 이순신이 이끌었던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은 노량 앞바다에서 적들의 길목을 차단한 뒤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이순신은 퇴각하는 왜군 병력을 다시 본국으로 보내면 훗날 재침략의 불씨가 될 거라 확신했고 이를 막기위해 단 한척의 왜선도 보내주지 않기 위한 최후 섬멸전을 펼친 것이었습니다. 

노량해전

 새벽 4시경 시작된 이 전투는 아침해가 떠오를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 전투의 결과는 조선측의 대승이었습니다. 

 

당시 왜군의 선박의 수는 최소 300척에서 최대 500척이었는데 이 전투 70%를 잃었다고 합니다. 또한 살아남은 30%는 전투 의지를 상실한 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고 전해집니다. 

 그에 대비해 조선은 10명 정도의 장교급 인사가 전사했고 판옥선 1척이 소실된 것 이외에는 피해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10명 정도의 장교급 인사 중 이순신 장군도 포함되어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을 막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가 임진왜란을 끝내고 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죽음에는 두가지 설이 있습니다.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가설 1. 의도적 죽음설

당시 임금인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권력이 땅으로 떨어졌었습니다. 그래서 선조에게 있어 이순신은 임진왜란을 승리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존재였습니다. 실제로 이순신은 국민들에게 국가적인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고 당시 민간에서는 그 위상이 선조보다 높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리하여 이를 견제하기 위해 선조는 전쟁 중 이순신을 옥에 가두는 등 그 명성과 위상을 꺾으려고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었습니다. 

 그래서 이 의도적 죽음설은 이러한 배경을 잘 알고 있었던 이순신은 마지막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후 자신을 의도적으로 죽음으로 내몰아 후환을 없앴다는 가설입니다. 

 

의도적 죽음설의 근거들 

이것을 유추할 수 있는 문헌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순신의 그림자와도 같았던 부하 류형은 이순신이 죽고 난 후 생전 자신에게 했던 말을 전했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예로부터 대장이 자기가 세운 전공에 대하여 인정을 받아보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는다면 대개는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적이 물러나는 그 날 죽음으로써 유감 될 수 있는 일을 없애도록 하겠다" 

또한 이순신은 생전 측근들에게 "전쟁 마지막 날에 죽기를 소망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문신 이민서의 <김충장공유사>에는 '이순신도 바야흐로 전쟁 중에 갑주를 벗고 앞장서 나섬으로써 스스로 탄환에 맞아 죽었다. 호남과 영남 등지에서는 부자 형제들이 서로 의병이 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는 내용이 있습니다.

김충장공유사

 

이 내용은 실제로 갑옷을 벗어던졌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앞장서서 싸웠다는 고사구절의 한 표현이라고 하지만 당시 이순신이 선조와 겪었던 일을 생각해보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숙종 때 좌이정을 지낸 판부사 이이명의 문헌 <가승발>에서 이순신을 두고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공은 용의주도하게 방비하여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왜 몸을 버리고 죽어야 했을까? 세상 사람들이 말하되 공이 성공한 뒤에도 몸이 위태로워질 것을 스스로 헤아리고 화살과 탄환을 맞으면서도 피하지 않았다고 했다. 어허, 참으로 슬프도다'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가설 2. 은둔설

이순신은 명량해전 직후 가장 아꼈던 셋째 아들 이면을 잃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순신은 '살생과 업보로 죄를 지은 자신이 죽어야 하는데 아들이 먼저 떠나고 말았구나'라고 일기에 적고 면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왜군들은 시시각각 조선을 압박해오고 있었고 전쟁 중에 부하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순신은 슬픔을 뒤로 하고 왜군들과 맞서 싸웠으나 정작 국왕이었던 선조 자신을 견제하기에 바빴습니다. 이렇게 갖은 상황 속에서 환멸을 느낀 이순신이 맡은 바 역할을 다하고 자신의 죽음을 위장하여 그 뒤로 15년을 더 살았다는 것이 바로 은둔설입니다

 

의도적 죽음설의 근거들

이순신은 노량해전 때 전쟁에 참여시키지 않았던 맏아들 이회와 조카 이완, 몸종이었던 김이를 데려갔습니다. 

이순신이 왜군이 쏜 총탄을 막고 임종을 다 할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역시 이들 셋이었다고 합니다. 이순신이 명을 달리하고 그의 지휘권을 이어받은 사람 역시 경험이 많던 여타 장수들이 아닌 그의 아들 회였습니다. 그렇게 이순신은 아들과 조카의 도움을 받아 절제절명의 순간 죽음을 숨길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또한 국장으로 치뤄진 이순신의 묘가 15년 뒤인 1614년에 600m 떨어진 곳으로 이장되었는데 이를 근거로 1614년이 이순신이 진정 죽음을 맞이한 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은둔설과 관련해서 남겨진 문헌은 하나도 남겨져 있지 않고 노량해전 이 후 이순신을 목격했다는 사람 역시 없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위의 두가지 가설 모두 그저 가설에 불과하고 이순신은 노량해전 중 전사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어떤 것이 사실이던 간에 이순신이 있었기에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고 그가 진정 나라와 부하들을 생각하는 충무공이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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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대기근 - 조선 최악의 재앙  (0) 2023.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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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부터 17세기의 집단 광기 유행 - 마녀사냥

14세기부터 17세기 사이 유럽에는 종교 재판이라는 이름의 피바람이 불었습니다.

약 300만 명에 가까운 이들이 같은 이유로 재판을 받게 되는데 피고는 누구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혼자 숨어서 사는 사람, 타인과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사람 심지어 이미 마녀라고 지목을 받아 투옥되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목해 함께 사형대에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이 종교 재판이 바로 그 유명한 마녀사냥입니다. 

고문받는 마녀

당연하게도 마녀로 지목된 이들은 주술을 사용하거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벌어진 전쟁, 기근, 전염병이라는 불행을 탓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지목되어 왔던 이들은 누군가의 변호도 받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심지어 마녀 재판에 사용되는 모든 비용은 마녀 본인에게 청구되었습니다. 마녀로 지목된 이는 대부분 사형을 당했기 때문에 그들이 죽고 나면 재산을 몰수하여 재판관들의 배를 불리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마녀를 가려내는 방법

재판의 시작은 보통 누군가의 고발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고발을 당한 사람이 재판에 올려지면 그들은 자신의 정체가 마녀인지 아닌지를 증명을 했어야했는데 그 과정은 보통 4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1. 눈물 시험

 우선 당시의 관념으로 마녀는 사악한 존재이기에 눈물을 흘릴 수 없다는 것이 사실로 알려져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마녀재판에 올라간 사람은 눈물 시험으로 정해진 시간 내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지 확인하는 절차를 걸쳐야했습니다.

 

2. 바늘 시험

그러나 이것을 통과하게 되면 악마의 도움을 받아 눈물을 흘린 것이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는 바늘 시험이라는 단계라는 테스트를 거쳐야 했습니다. 당시에 마녀들은 악마와 계약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가지고 있는데 이 흔적은 통증을 느끼지 않으며 피도 흐르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마녀로 몰기 위해 사마귀를 찾는 사람들('마녀시험'-톰킨스 H,매티슨)

그래서 재판관들은 마녀로 지목된 사람들을 나체로 관찰하다가 신체의 특이한 부분이 있으면 바늘로 찔러 피가 나오는지 혹은 고통을 느끼는지 관찰했습니다.

 

3. 불 시험 

 하지만 어이없게도 여기서도 피가 나오거나 고통을 느낄 경우 악마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세 번째 시험으로는 달구어진 쇠로 마녀를 지지거나 불판 위를 걷게하는 방식의 끔찍한 방법을 채택했습니다. 여기서 상처가 생기지 않으면 마녀라는 것이었죠. 보통의 인간은 이 시험에서 절대로 상처가 나지 않을 수 없고 또 엄청난 고통이 수반되기에 재판관들은 이 시험을 승낙하는 것 자체가 마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4. 물 시험 

마지막으로 깨끗한 물에 던져 넣어 물 밖으로 밀려 나오는지 봤습니다.

예로부터 물은 아주 깨끗한 속성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왔기에 악한 것이 들어가면 물 밖으로 튕겨져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만약 마녀로 판단되는 이가 밖으로 밀려나오지 않고 물 안에 있게 되면 마녀가 아닌 것이고 물 밖으로 튕겨져 나오면 마녀라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마녀는 없었기에 물 밖으로 튕겨져 나올리는 없고 물 안에서 밀려나오지 않으면 익사로 죽음을 맞이하게되는 것이었습니다.

즉 재판 자체로 사형이나 마찬가지였던 시험이었습니다

 

마녀 재판의 배경

사실 처음부터 마녀가 사악한 존재로 여겨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혼자 사는 여성들 아이들과 친밀한 존재로 주술을 사용하여 약한 이들을 돕고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의사, 약사, 산파 , 무속인과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마녀라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1317년 요한 22세에 교황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암살 자체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교황을 죽이러 했던 것이 다름 아닌 교회의 고위 사제였으며 암살 방법은 마녀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주술이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계기로 주술은 악하고 잘못된 것으로 인식되었고 마녀 또한 다정하고 정겨운 존재가 아니라 사악한 존재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484년 12월 5일 인노첸시오 교황은 <지고의 것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라는 칙서를 발표하는데 그 내용은 '사악한 주술을 행하는 주술사들과 마녀를 단죄하고 이들에 대한 이단 신문관의 조사를 지지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교황이 마녀 사냥을 허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486년 독일의 이단 심문관 하인리히 크라메르는 '말레우스 말레피카룸' 이라는 책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 책의 내용은 마녀의 정의, 마녀를 구별하는 법 등이 적혀있었는데 마녀의 피해를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고문으로 인한 자백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이 책은 마녀 사냥의 기초가 된 동시에 마녀 사냥에 기름을 끼얹게 됩니다. 

 

마녀사냥의 끝

시간이 지나 1680년 유럽에서는 마녀를 처벌하는 것이 아닌 마녀인 척 하는 이들을 처벌하라는 법령이 선포됩니다. 이때부터 무차별적인 마녀사냥이 끝나갔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2000년 3월 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기억과 화해 : 교회의 과거의 잘못> 이라는 문건을 발표합니다. 이 문건으로 과거 교회가 신의 뜻이라는 핑계로 인류에게 저지른 처참한 잘못을 최초로 인정하고 마녀 사냥에 대하여 전 세계적으로 사죄한 것입니다.  그렇게 집단 광기로 퍼져버린 마녀 사냥은 카톨릭의 인정과 사과를 끝으로 역사에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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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앙의 예고 - 하늘의 땅에서 발생하는 기현상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하늘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면 그것은 삿된 일의 징조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현상이 1670년 1월 1일 발생합니다. 바로 안쪽에는 붉은 빛을 띄고 바깥쪽은 푸른 빛을 띄는 해무리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해무리를 시작으로 하늘에서 각종 이상현상들이 나타났습니다. 

 어느 날  평안도에서는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으며 희천군에서도 햇무리가 지고 양이(해의 양쪽에 두 개의 고리가 생김) 가 있었고 그 모양은 흰 무지개 세 가닥이 가로로 얽힌 모양새였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또한 태백성(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 현종 11년 1월 6일 - 

 밤에 유성이 하고성(독수리자리) 위에 나왔는데 꼬리가 길고 색깔이 붉었다. - 현종 11년 1월 10일- 

등 이러한 유사한 일들이 1월 내내 발생하여 보고에 올라왔다고 합니다. 

 

땅에서는 자연재해가 계속 발생했습니다 .현종 11년 2월에 한양에는 눈과 우박이 쏟아졌는데 그 크기가 오리알만하여 4살된 아이가 우박에 맞아 즉사하는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또한 평안도에는 3월 말까지도 서리가 내려 심어둔 곡식의 싹이 죽고 나머지 식물들도 피해를 입었습니다. 4월부터는 엄청난 가뭄이 닥쳐 들판이 모두 타버리고 밀과 보리조차 수확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던 5월 갑자기 마른 하늘에 큰 비가 내립니다. 문제는 이 큰 비가 정말 그칠 줄 모르고 내렸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비로 전국 팔도에 홍수가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각종 산사태가 발발합니다. 

 

재앙의 시작

이런 자연재해들로 수확할 수 있던 식량은 없고 그동안 있었던 식량들도 모두 사라진 지 오래였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진휼소라는 곳을 마련하여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등 대책을 마련했지만 너무 오래되는 굶주림과 각종 전염병 등으로 약해진 백성들은 줄을 기다리는 중에도 죽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길거리에는 기아로 죽은 사람들이 넘쳐났으며 곡소리로 가득찼다고 합니다. 그러나 곧 곡소리는 사라지고 더 큰 지옥이 시작됩니다. 이미 기아로 죽은 사람들을 슬퍼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 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대기근 1년이 지난 시점부터 사람들은 서로를 잡아먹기 시작합니다. 그 기록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연산에 사는 사가의 여비 순례가 깊은 골짜기 속에서 그의 다섯 살된 딸과 세 살 된 아들을 죽여서 먹었는데 가서 사실 여부를 물으니 그들은 아들과 딸이 병 때문에 죽었는데 큰 병을 앓고 굶주리던 중에 삶아 먹었으나 죽여서 먹은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합니다. 죽은 이들을 먹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고 죽어가는 이를 먹는 것도 당연해지고 있었습니다. 조정도 이러한 사태에 대해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식인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벌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자신의 자식 또는 부모를 잡아먹는 이들이 너무 많아 '차라리 버리고 가는 것이 자비롭다' 라는 이야기까지 떠돌았습니다. 

 

이 기근은 2년만에 막을 내렸는데 2년동안 피해가 엄청났습니다. 당시 기록된 피해자만 봐도 1400만 인구 중 85만명이 기근으로 사망했는데 기록되지 않은 인구가 더 많았다고 볼 정도로 실제로 입은 피해는 더 컸습니다. 

 

대기근의 원인 

학자들은 재앙의 원인을 소빙하기가 원인이라는 봅니다.  실제로 당시 구의 온도가 전체적으로 1도 정도 낮아졌던 해인데 조선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수준의 역병과 기근이 돌았다고 합니다. 

 

 같은 시기에 인도에서는 대칸 대기근이 발생하고 여기서 사망한 인도인은 700만 정도로 집계됩니다. 또한 일본에서도 대기근이 발생하였고 유럽에서는 대 역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시기에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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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의 배경

어느 혁명 시기나 그렇겠지만 18세기 초 유럽의 프랑스의 당시 정치는 매우 악독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왕들의 권력은 신이 내린 것이라며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 건축을 지으며 왕권을 과시하고 라이벌인 영국을 상대하고자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프랑스의 재정을 악화시켰습니다.

 

당시 이렇게 열악해진 재정을 프랑스 인구의 98%를 차지하는 평민들이 세금으로 부담했고 2%의 성직자와 귀족들은 세금을 내지 않고 특권만 누렸습니다. 특히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화려한 옷을 입고 한밤중에 수많은 촛불을 대낮처럼 밝히고 무도회를 열곤 했습니다. 

 

대혁명의 발단 - 삼부회 

 이런 상황 속에서 1787년 대혁명의 발단이 시작됩니다. 

엉망이 된 프랑스의 재정을 살리기 위해 재무장관 칼론은 귀족도 모두 세금을 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당연히 성직자와 귀족들은 이에 반발하고 칼론은 실각합니다.

이때 새로이 등장한 재무장관 자크 네케르는 삼부회 개최를 하게 됩니다.  이는 성직자, 귀족, 평민이 한 자리에 모여 하는 회의로서 약 170년 만에 개최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삼부회가 개최됩니다.

이 자리에 모인 의원은 약 600명으로 특권층인 제 1,2 신분이 300명 제 3신분인 평민이 300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삼부회는 98%에 해당하는 평민들은 다수결의 방식을 선호했고 귀족들은 신분별 표결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또한 귀족 대표들은 평민 대표들이 회의실에 들어가지도 못하도록 문을 잠그고 무시하는 일들이 빈번하자 평민 대표들은 근처 테니스 코트로 이동하여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절대 국민의회를 해산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테니스코트 서약 : 1789.6.20) 

루이 16세의 초상

결국 루이 16세는 국민의회를 인정하고 국민의회는 프랑스의 절대 왕정을 입헌군주제로 바꾸는 헌법 제정에 착수하게 됩니다. 그런데 루이 16세는 이 와중에도 계속 불안에 떨어야 했는데 이는 과거의 영국의 왕 찰스 1세가 의회에 의해 처형당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루이 16세는 국경에 주둔한 군대를 파리로 이동시켜 파리 시내를 공포와 불안감으로 뒤덮고 국민의 영웅으로 지지를 받던 네케르를 파면해 버립니다. 이에 파리 시민들은 분노에 휩싸이게 됩니다. 

 

대혁명의 시작 - 바스티유 감옥 습격

그로부터 3일 뒤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스티유 감옥은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던 감옥이자 수많은 무기들이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시민들은 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합니다. 결국 국민의회가 나서서 귀족들도 세금을 내게 하고 시민들을 함부로 노예처럼 부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어 8월 26일 프랑스 인권선언이 채택됩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해서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년 7월 28일')

그런데 감옥까지 습격하며 시민들이 이루어낸 인권 선언이 체결되고도 여전히 생활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혁명 지도자인 장 폴 마라는 수천 명의 여성을 모집하여 왕이 있는 궁전으로 행진하도록 합니다. 여성의 행렬에는 대포를 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궁전에 쳐들어간 수천 명의 여성들은 루이 16세를 끌고 와 튈르리 궁전에서 포로와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도록 합니다.

그렇게 루이 16세는 모든 일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오스트리아의 도움을 받기 위해 나라 밖으로 탈출하려 하지만 프랑스 국경지대의 바렌에서 혁명군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민심은 더욱 반발하고 제헌의회의 힘은 커져 인권 선언을 전문으로 하는 헌법 제정이 통과됩니다.

여기서 모든 봉건적 특권이 폐지되고 삼권분립의 원칙이 들어서게 됩니다,

 

대혁명의 위기 - 혁명 전쟁 발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라는 나라는 이러한 혁명이 자기 나라에도 올까봐 프랑스 혁명을 방해했습니다.

이에 참지 못한 프랑스는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혁명 전쟁이 발발합니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는 패전을 거듭하다 결국 국격까지 뚫리게 됩니다. 

 이에 전국에 비상사태 선포가 되었고 전국 각지에서는 의용군이 조직되어 파리로 집결하게 됩니다 . 

이렇게 모인 의용군들에게 적팀인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루이 16세의 권리를 되찾겠다" 라고 말합니다.

즉 예전 절대왕정으로 돌리겠다는 뜻이었죠. 이 말은 프랑스 민중을 더욱 분노시켰고 즉시 왕을 폐위시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대혁명의 결과 - 군주제 폐지

 이에 당시 프랑스 정파 중 하나인 '자코뱅당'은 시청을 점령하고 새로운 시정기구 '파리코뮌'이 만들어집니다.

파리코뮌의 지도하에 튈르리 궁을 점령하였고 입법 위에는 압력에 못 이겨 국왕을 폐위하고 대신을 교체하였으며 국민 의회를 소집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렇게 설립된 국민 공회는 만장일치로 군주제를 폐지하고 프랑스 제1공화국을 탄생시킵니다.

로베스 피에르의 초상

 이 때 가장 큰 공헌을 한 자코뱅당의 로베스 피에르는 권력을 잡게되고 루이 16세는 궁전에서 적과 주고받은 편지가 발견되어 반역죄로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루이 16세 뿐 아니라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해 반혁명 세력 약 1만명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로베스 피에르는 여기서 끝내지 않고 중립적인 자들까지 처형을 해야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합니다. 게다가 이러한 공포정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사형 또는 무죄 만을 판결할 수 있는 법안까지 통과시킵니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킨 시민들은 이러한 행태를 바라만 보지 않았습니다. 결국 로베스 피에르는 본인이 만든 법안에 의해 단두대에 보내지게 됩니다. 

 

나폴레옹의 등장과 대혁명의 끝

나폴레옹

이 후 혼란스러운 내부 상황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되는 반란을 진압하며 영웅이 나타나는데 그는 바로 유명한 나폴레옹 이었습니다. 그는 천재적인 능력으로 이탈리아 이집트 원정 등 외국의 군대들을 격파해 나갑니다.

그리고 국내로 돌아와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며 혁명의 종식을 선언과 나폴레옹 제1통령 취임이 이루어지며 혁명은 마무리가 됩니다. 집길고 길었던 혁명은 이렇게 끝이 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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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무역 상황 

1780년 영국에서는 상류층들이 차를 즐겨 먹는 것이 유행이었기 때문에 중국으로부터 차를 대량으로 수입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중국은 도자기 만드는 솜씨가 뛰어나 도자기도 수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차와 도자기를 수출하는 대가로 영국은 은과 시계 같은 고급진 물품들을 중국에 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차랑 도자기의 수입은 너무 많고 그에 비해 은과 시계들을 쥐꼬리만큼 수출하다 보니 영국은 남는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이 적자를 어떻게 해결할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주 좋은 생각 하나를 해냈습니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를 이용하여 인도가 아편을 재배하고 그것을 중국에다가 팔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받아온 은은 다시 영국에게 토해내고 면제품 같은 것을 그 답례로 받아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차와 은을 동시에 얻으면서 삼각 무역은 시작되었고 영국은 이 재미를 아주 톡톡히 봅니다.

 

아편 중독 시작과 영국, 중국의 갈등 심화

한 번 아편을 펴본 사람들은 그 쾌감과 중독을 끊지 못하고 계속해서 밀수입하였고 그 영향력은 점차 모든 계층에 퍼지게 됩니다. 이때 중국의 4분의 1이 아편을 피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편 중독자의 모습

이러한 풍조로 중국에서는 부패와 전투 능력 상실, 국가 기강 해이, 경제 파탄 등 갈수록 그 타격은 커져만 갔습니다.

이렇게 중국은 아편의 수입 대금을 은으로 결제하면서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자 중국도 단단히 화가 나게 됩니다.

그래서 임칙서라는 중국의 정치가가 외국인 상점을 봉쇄하는 압박을 가합니다. 1839년 6월 3일 임칙서는 23일에 걸쳐 외국 상인들의 아편 2만 상자를 모두 녹여버리는 등 철저히 아편 단속을 시행하고 마약상들은 결국 홍콩으로 철수합니다.

아편 무역선이 불타고 있다.

자기들의 생각대로 상황이 진행되지 않자 화가 난 영국은 중국의 물건도 박살을 내자는 전쟁파와 그래도 영국의 명예를 지키자고 외치는 전쟁 반대파로 반으로 나뉘게 됩니다.

 

1차 아편전쟁과 난징 조약 체결

 결국 투표가 진행되었고 결과는 271대 262표로 아슬아슬하게 전쟁파가 이기게 됩니다. 그렇게 1840년 영국은 단단히 무장하고 중국으로 쳐들어갑니다.

사실 단단히 무장할 것도 없이 중국은 영국에 비해 너무나 약했기 때문에 거의 일방적인 학살 수준이었습니다.

단일 전투 중 영국군은 단 36명만 전사했다는 전투도 있었습니다. 결국 중국은 영국에게 무릎을 꿇고 난징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항구를 개항하여 영국의 물건을 더 팔아 넘겼고 외국 무역 독점 상인을 없애면서 중국에게 물건을 팔 때 세금을 덜 내게 하였습니다. 홍콩은 1년 전부터 영국이 강제로 점령하고 있었지만 이 기회에 정식으로 뺏어 옵니다.

그렇게 10여 년이 흐르고 그동안 영국은 개항된 항구로 면제품을 중국에 수출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은 사회 경제적 구조가 여전히 자급자족인 성격이 강해서 수입 제품을 꺼려했고 심지어 중국 농촌에서 생산해낸 면포가 값도 싸고 질도 좋았기 때문에 굳이 호되게 당한 영국의 것을 살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중국에 물건을 팔 수 있는 지역을 넓혀달라고 했지만 중국은 전혀 응하지 않았습니다.

 

2차 아편전쟁과 텐진 조약의 체결 

물건을 팔기위해 기회를 노리던 영국에게 한 가지 사건이 터져버립니다.

중국에 들어온 영국의 해적선 '애로호'가 검거를 받던 중 영국의 국기를 훼손한 것입니다.

러나 당시 중국은 '애로호'에는 국기가 걸려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영국에게는 훼손이 되던 말던 상관없었습니다. 단지 전쟁을 위한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었죠.  그렇게 이를 꼬투리 잡아 영국은 전쟁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때마침 중국에서 프랑스 선교사 한 명이 처형되는 일이 벌어져 프랑스 또한 영국과 손을 잡게 되고 러시아 미국도 이 연합군과 함께 전쟁에 끼게 됩니다.

 연합군을 구성한 영국과 프랑스는 광저우 시내를 점령하고 불을 지르고 민간인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베이징의 관문인 텐진까지 점령하자 중국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텐진 조약'을 맺게 됩니다.

 

기존 조약에 영국이 그토록 원하던 무역확대를 위한 추가 항구가 서명된 것이었습니다. 

(외교관 베이징에 상주가능, 10개 항구 추가 개방, 배상금 지불) 

피해 배상금으로 영국과 프랑스에 각각 400만 200만 달러의 은을 지불하였습니다.

 

베이징 조약의 체결

텐진 조약에서 본 것과 같이 서양의 외교관은 베이징에 상주가 가능했지만 중국은 서양의 군사는 수도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외교관을 수호하겠다며 2,200명의 병력과 21척의 선박이 강제로 들어왔고 이번에는 베이징 코앞에까지 서양 군대가 밀고 들어왔습니다.

이에 교섭을 했고 결국 공친왕과 연합군의 협상에 의하여 전쟁은 종결되었고 러시아 제국의 중재 하에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여기서 아편 무역이 합법화가 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여 기독교가 들어오게 됩니다. 

 

아편 전쟁의 후유증

아편 전쟁으로 인해 중국 현재까지도 마약과 관련된 범죄만큼은 무관용 원칙으로 강격 대응하고 있습니다. 일정량 이상의 제조, 유통만 하더라도 최소 종신형이고 사형까지도 집행받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강경책은 자국민뿐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적용하는데 2014년말 한국인 마약사범이 체포되는 일이 있었는데 중국 정부는 바로 사형을 집행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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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버스의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

지구가 평평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1492년 콜롬버스가 새로운 땅이 발견됩니다.

그 땅은 바로 숨겨진 땅 아메리카입니다. 이 신대륙의 발견은 유럽인들에게 엄청난 행운이었습니다.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

당시 유럽은 인도와 중국에게 적자를 내면서 손해 보는 무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인도와 중국의 제품들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던 시기라 수입은 많았지만 이들에게 팔 만한 제품은 마땅치 않아서 유럽 국가들은 결국 은으로 물건 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이 신대륙의 발견은 이 적자를 메울 수 있는 엄청난 기회였습니다. 이곳에서 수많은 은을 캐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16세기부터 유럽은 아메리카로 몰려들어 원주민들을 내쫓고 이곳을 정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게다가 아메리카 대륙은 담배와 설탕도 풍부했는데 점차 사람들이 담배의 중독과 설탕의 강력한 단맛에 빠지면서 아메리카 대륙은 담배와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지옥의 항해

 이렇게 캐낼건 많았지만 그 모든 것을 취하기 위한 인력은 턱없이 부족해져 갔습니다.

이를 충당하기 위해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 사는 흑인들을 노예로 쓰기 위해 사냥하기 시작했습니다.

잡혀온 노예들은 사탕수수 재배와 설탕 생산에 이용되었는데 사탕 수수를 재배하여 짜내는 일은 굉장히 힘들었으며 특히 설탕을 끓이는 일은 60도에 가까운 고열을 견뎌야 했습니다.

 

하지만 노예들에게 더욱 더 끔찍한 것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을 하기 위한 항해과정이었습니다. 

수천 킬로를 가야하는 유럽인의 입장에서는 한 번 올 때 최대한 많은 인원을 태워야 했고 사실 이들에게 노예는 전부 돈이기 때문에 꾸역꾸역 밀어넣어 아메리카로 향했습니다.

배에 밑바닥에 차곡차곡 쌓인 노예들

 좁디 좁은 배 안에 수백 명의 노예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쇠사슬에 묶인 채로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또한 모두 쇠사슬에 묶여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누워있는 채로 생리현상을 처리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처참한 상황 때문에 전염병이 도는 것은 당연하며 땀과 용변 토사물 위에 누운 상태로 항해를 계속 해야 했습니다.

 

이 지옥의 항해는 짧으면 1개월 길면 6개월이나 걸려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을 때는 6명 중 1명은 사망하였고 시체는 바다에 버려졌습니다.

 

생존을 위한 발악 

한편 아프리카 본토에서는 유럽인들에게 끌려가지 않고자 주변 나라의 동족들을 대신 잡아와 팔아버리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때문에 아프리카 내에서도 영토를 넓히고 포로를 잡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 나라와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그중 아가자왕이 이끄는 다호메이 왕국이 대서양 연안의 도시들을 정복하여 지역의 강자로 떠오릅니다.

결국 다호메이 왕국은 대서양 노예무역의 주요 공급 국가가 되어 후에는 끌려간 노예의 20%를 여기서 공급될 만큼 중심지로 알려지게 됩니다.

 여기에는 노예들을 가두던 노예의 집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1층은 노예를 가두는 곳 2층은 이들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1층에는 40명 정도의 노예를 가두어 유럽인들에게 팔리기 전까지 쇠사슬에 묶어 가뒀으며 모든 노예는 하루에 한 번 화장실에 갈 수 있는 시간을 제외하곤 항상 갇혀 지내야만 했습니다.

체격 기준을 통과한 사람들은 앞마당에서 경매로 팔려갔고 몸이 허약하거나 아픈 사람들은 앞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영웅의 등장

당시에 지하철도라고 불리는 비밀 조직이 있었습니다.

이 조직은 1840년부터 약 20년 동안 수천 명의 흑인 노예들을 탈출할 수 있게끔 도운 조직입니다. 

지하철도의 도움으로 북부의 필라델피아로 탈출하여 자유를 얻은 해리엇 터프먼이라는 여성은 지하철도 조직에 들어가 똑같이 다른 사람들을 돕는 활동을 시작합니다.

해리엇 터프먼

나중에는 그녀에게 4만 달러의 현상금이 붙기도 했지만 치밀하고 교묘한 움직임으로 10년 동안 300명의 흑인들의 탈출을 도왔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남북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요리사 간호사 혹은 정찰병이자 간첩으로 활약하면서 700명이 넘는 노예들을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병 때문에 몸이 편하게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그녀는 노예와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열심히 싸웠으며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는 남을 도와주는 삶을 살다가 88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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