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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 루주 정권 시절 캄보디아에서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바로 대규모의 학살인데 이를 킬링필드라고 부르며 인류사를 통틀어서도 이정도의 비참한 짓은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입니다.

오늘은 끔찍하고 잔혹했던 그 날의 사건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사건의 배경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은 캄보디아 지역에 많은 베트콩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캄보디아 지역에 일본 본토에 떨어뜨린 폭탄의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의 폭탄을 투하하게 됩니다. 동시에 친미 우익 세력들을 지원해 이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1970년 론 놀이 쿠데타를 일으켜 캄보디아의 권력을 장악합니다. 

 론 놀은 미국의 지원을 받고 권력을 잡았기에 미군에 의해 자국민이 폭격을 막고 죽는 상황에서도 자신들과는 관련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게다가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를 저질러 캄보디아 경제에 심한 타격을 입혀 캄보디아 국민들은 론 놀과 미국을 싫어했습니다. 

 

이때 크메르 루주는 반미 정서를 이용해 평화,평등,공평을 내세우며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크메르 루주는 프랑스어식 표현으로 빨간 크메르를 말하며 빨간색은 공산주의를 상징하고 크메르란 캄보디아 인구10%를 차지하는 캄보디아의 주류 민족을 나타냅니다.)

  크메르 루주는 론 놀의 쿠데타로 쫓겨났던 시아누크 국왕과 손을 잡으며 보수 세력에게도 지지를 받아 세력을 크게 성장시켰습니다. 그렇게 세력이 커진 크메르 루주는 정부군과 내전을 일으킵니다. 다급해진 론 놀은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해   1억 5천만 달러에 달하는 원조금을 받았지만 이미 민심이 넘어가 내전에서 승리하긴 힘들었습니다. 

결국 캄보디아 내전은 정부군이 패배해 1975년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을 크메르 루주가 장악하며, 론 놀은 해외로 도피하며 친미정권은 끝이 나게 됩니다. 

폴포트의 크메르 루주

압도적인 권력을 잡은 폴포트

이때부터 크메르 루주의 폴 포트란 인물이 캄보디아의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폴포트의 본명은 살로르 사르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 상당히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국비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프랑스로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였습니다. 폴포트란 이름은 조국 캄보디아에서 프랑스군의 탄압을 맞서 독립운동 할 때 썼던 예명이며 정확한 유래와 의미는 알려져있지 않지만 'Political potential(정치적 가능성)'의 단어에서 따왔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폴포트의 사진

폴포트는 집권하자마자 론 놀을 따랐던 수하들과 가족들 총 700여 명을 죽인 뒤 그냥 내다 버렸으며, 당시 분열되어 있었던 공산당을 장악한 후 공무원들과 군부 내에서도 대대적인 숙청을 했습니다. 이렇게 폴포트는 압도적인 권력을 잡게 됩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나라를 만든 폴포트

풀포트는 자신의 롤 모델인 마우쩌둥이 주도했던 중국의 대약진운동을 모방하여 과격하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캄보디아를 운영했습니다.  중국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자본주의의 산물인 도시가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없애버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개인의 사유재산 소지를 완전히 불허하는 등 시장 경제 시스템 자체를 없애버리려고 했습니다. 게다가 화폐 제도도 폐지했고 우리나라에 한국은행 정도로 볼 수 있는 프놈펜 중앙은행을 폭탄으로 폭파시켰습니다.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없고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미친짓이었습니다. 

이로써 화폐와 시장 경제가 없어졌기 때문에 모든 물건은 물물 교환 형식으로 얻어야 했고 그마저도 본인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대다수의 필수품들은 국가의 배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중국과 일부 교류를 제외하고는 외국과의 외교도 단절하고 무역도 소멸되었습니다. 또한 신문을 발행하는 것도 금지되어 언론사들도 강제 폐간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결혼과 연애또한 금지당했고 국가가 허락해야지만 가능했습니다. 

앞서 말했듯 도시를 없애버렸기 때문에 도시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강제 귀농을 하게 되었고 국가에서 정해준 할당량을 매일 채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도시에 있었던 사람들은 농업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에 노동력은 많았지만 수확량을 많이 줄어들었으며 수확한 농작물들은 국가에서 무기로 바꾸어 많은 사람들이 기근과 기아에 시달려야했습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 끔찍한 대학살의 시작

이런 미친 상황에 캄보디아 전역에서는 시민들은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무력 저항도 심화되어 내전이 벌어질 상황 치닫습니다. 폴포트는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고 공표하며 저항하는 자국민들을 대상으로 잔인한 정책을 펼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항하는 대상뿐 아니라 자본주의에 빠질 만한 사람들까지 영역을 확대하며 엄청난 사람들이 숙청의 대상이 됩니다. 자본주의의 '자'에 관련되어있으면 모조리 대상이었는데 그 예로 무역관,외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 교사, 의사, 약사, 교수 등 전문적인 직종, 스포츠인, 예술가 등 농민가 노동자를 제외한 모든 직종의 사람들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대학살로 죽어간 사람들

폴포트는 지식인까지도 몰살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지식인인지 판단하는 여부가 매우 주관적이고 황당했습니다. 

일단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처형 대상에 들어갔고 영어를 할 수 있거나 손바닥에 노동의 상징인 굳은살이 없다, 안경을 썼다, 책을 똑바로 들고 있는다 등 정말 어이없는 이유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당시 약 800명 정도의 의사 중 40명만 살아남았고 판사는 545명 중 단 4명만 살아남았습니다. 

 또한 크메르 족을 제외한 소수민족 또한 숙청의 대상이었으며 당시 인구의 15%정도로 많은 소수민족들을 보이는대로 죽였습니다. 

 폴포트는 반동분자의 씨를 말려야한다며 자본주의에 물든 사람들을 체포해와서 잔인하게 죽였으며 체포된 사람의 3대까지 연좌제를 적용했습니다. 처형자의 아내와 형제는 물론 자녀까지도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폴포트의 몰락

폴포트는 극단적인 공산주의였지만 같은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을 극도로 혐오했습니다. 베트남에게 시달렸던 역사때문에 그랬던 것이었죠. 그래서 베트남계 캄보디아인들과 친 베트남 성향의 인사들이 대대적으로 처형했고 1978년에는 베트남을 선제 공격을 하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베트남은 1978년 25만의 병력으로 캄보디아를 침공했고 1979 프놈펜을 점령해 베트남 괴뢰 정부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면서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라 불리는 비극이 끝이나게 됩니다. 

 캄푸치아 정부는 화폐 제도도 복원시키고 학교,병원, 방송국,은행 등을 복구시켰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친중 정권이었던 크메르 루주 정권을 무너뜨린 베트남에 캄보디아의 해방 등을 명분으로 베트남을 공격하면서 중월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때 미국은 크메르 루주가 킬링 피드를 저질렀다는 사실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베트남 전쟁의 치욕을 갚기 위해 크메르 루주를 지원하며 내전이 또 발발하게 되며 수십만의 사람이 죽어나갔습니다.  1989년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고 캄보디아의 자치권을 인정받게 되고 1998년 폴포트가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드디어 크메르 루주는 역사에서 지워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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