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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의 배경

어느 혁명 시기나 그렇겠지만 18세기 초 유럽의 프랑스의 당시 정치는 매우 악독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왕들의 권력은 신이 내린 것이라며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 건축을 지으며 왕권을 과시하고 라이벌인 영국을 상대하고자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프랑스의 재정을 악화시켰습니다.

 

당시 이렇게 열악해진 재정을 프랑스 인구의 98%를 차지하는 평민들이 세금으로 부담했고 2%의 성직자와 귀족들은 세금을 내지 않고 특권만 누렸습니다. 특히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화려한 옷을 입고 한밤중에 수많은 촛불을 대낮처럼 밝히고 무도회를 열곤 했습니다. 

 

대혁명의 발단 - 삼부회 

 이런 상황 속에서 1787년 대혁명의 발단이 시작됩니다. 

엉망이 된 프랑스의 재정을 살리기 위해 재무장관 칼론은 귀족도 모두 세금을 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당연히 성직자와 귀족들은 이에 반발하고 칼론은 실각합니다.

이때 새로이 등장한 재무장관 자크 네케르는 삼부회 개최를 하게 됩니다.  이는 성직자, 귀족, 평민이 한 자리에 모여 하는 회의로서 약 170년 만에 개최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삼부회가 개최됩니다.

이 자리에 모인 의원은 약 600명으로 특권층인 제 1,2 신분이 300명 제 3신분인 평민이 300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삼부회는 98%에 해당하는 평민들은 다수결의 방식을 선호했고 귀족들은 신분별 표결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또한 귀족 대표들은 평민 대표들이 회의실에 들어가지도 못하도록 문을 잠그고 무시하는 일들이 빈번하자 평민 대표들은 근처 테니스 코트로 이동하여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절대 국민의회를 해산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테니스코트 서약 : 1789.6.20) 

루이 16세의 초상

결국 루이 16세는 국민의회를 인정하고 국민의회는 프랑스의 절대 왕정을 입헌군주제로 바꾸는 헌법 제정에 착수하게 됩니다. 그런데 루이 16세는 이 와중에도 계속 불안에 떨어야 했는데 이는 과거의 영국의 왕 찰스 1세가 의회에 의해 처형당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루이 16세는 국경에 주둔한 군대를 파리로 이동시켜 파리 시내를 공포와 불안감으로 뒤덮고 국민의 영웅으로 지지를 받던 네케르를 파면해 버립니다. 이에 파리 시민들은 분노에 휩싸이게 됩니다. 

 

대혁명의 시작 - 바스티유 감옥 습격

그로부터 3일 뒤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스티유 감옥은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던 감옥이자 수많은 무기들이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시민들은 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합니다. 결국 국민의회가 나서서 귀족들도 세금을 내게 하고 시민들을 함부로 노예처럼 부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어 8월 26일 프랑스 인권선언이 채택됩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해서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년 7월 28일')

그런데 감옥까지 습격하며 시민들이 이루어낸 인권 선언이 체결되고도 여전히 생활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혁명 지도자인 장 폴 마라는 수천 명의 여성을 모집하여 왕이 있는 궁전으로 행진하도록 합니다. 여성의 행렬에는 대포를 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궁전에 쳐들어간 수천 명의 여성들은 루이 16세를 끌고 와 튈르리 궁전에서 포로와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도록 합니다.

그렇게 루이 16세는 모든 일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오스트리아의 도움을 받기 위해 나라 밖으로 탈출하려 하지만 프랑스 국경지대의 바렌에서 혁명군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민심은 더욱 반발하고 제헌의회의 힘은 커져 인권 선언을 전문으로 하는 헌법 제정이 통과됩니다.

여기서 모든 봉건적 특권이 폐지되고 삼권분립의 원칙이 들어서게 됩니다,

 

대혁명의 위기 - 혁명 전쟁 발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라는 나라는 이러한 혁명이 자기 나라에도 올까봐 프랑스 혁명을 방해했습니다.

이에 참지 못한 프랑스는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혁명 전쟁이 발발합니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는 패전을 거듭하다 결국 국격까지 뚫리게 됩니다. 

 이에 전국에 비상사태 선포가 되었고 전국 각지에서는 의용군이 조직되어 파리로 집결하게 됩니다 . 

이렇게 모인 의용군들에게 적팀인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루이 16세의 권리를 되찾겠다" 라고 말합니다.

즉 예전 절대왕정으로 돌리겠다는 뜻이었죠. 이 말은 프랑스 민중을 더욱 분노시켰고 즉시 왕을 폐위시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대혁명의 결과 - 군주제 폐지

 이에 당시 프랑스 정파 중 하나인 '자코뱅당'은 시청을 점령하고 새로운 시정기구 '파리코뮌'이 만들어집니다.

파리코뮌의 지도하에 튈르리 궁을 점령하였고 입법 위에는 압력에 못 이겨 국왕을 폐위하고 대신을 교체하였으며 국민 의회를 소집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렇게 설립된 국민 공회는 만장일치로 군주제를 폐지하고 프랑스 제1공화국을 탄생시킵니다.

로베스 피에르의 초상

 이 때 가장 큰 공헌을 한 자코뱅당의 로베스 피에르는 권력을 잡게되고 루이 16세는 궁전에서 적과 주고받은 편지가 발견되어 반역죄로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루이 16세 뿐 아니라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해 반혁명 세력 약 1만명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로베스 피에르는 여기서 끝내지 않고 중립적인 자들까지 처형을 해야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합니다. 게다가 이러한 공포정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사형 또는 무죄 만을 판결할 수 있는 법안까지 통과시킵니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킨 시민들은 이러한 행태를 바라만 보지 않았습니다. 결국 로베스 피에르는 본인이 만든 법안에 의해 단두대에 보내지게 됩니다. 

 

나폴레옹의 등장과 대혁명의 끝

나폴레옹

이 후 혼란스러운 내부 상황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되는 반란을 진압하며 영웅이 나타나는데 그는 바로 유명한 나폴레옹 이었습니다. 그는 천재적인 능력으로 이탈리아 이집트 원정 등 외국의 군대들을 격파해 나갑니다.

그리고 국내로 돌아와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며 혁명의 종식을 선언과 나폴레옹 제1통령 취임이 이루어지며 혁명은 마무리가 됩니다. 집길고 길었던 혁명은 이렇게 끝이 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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