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폭탄 투하 사건의 배경

일본은 태평양 전쟁과 중일전쟁에서 이미 많은 피해를 입어 미국에 항복하지 않으면 멸망이 확실한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일본 국민들은 매일 굶주림에 시달려 더이상 전쟁을 이어나갈 자원조차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미국의 적국 중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은 이미 1945년 5월에 항복선언을 하였으나 일본만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에 미국은 '1945년 8월 1일까지 항복하면 일절 불문에 붙이겠다'는 전쟁사에 드문 관대한 선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자국민을 재료로 쓰는 카미카제(자살공격) 등 항복을 거부합니다. 결국 미국은 일본인은 완전 소멸 또는 국가 존속이 위협을 받아야 항복한다고 판단하여 핵 투하를 결정하게 됩니다.

 

히로시마 핵폭탄 투하 

1945년 8월 6일 새벽 2시 45분 핵폭탄 리틀 보이를 실은 폭격기 에놀라 게이(ENOLA GAY)는 일본의 히로시마를 향해 투하되었고 히로시마 상공 약 570m 위치에서 폭발했습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후 사진

폭발과 동시에 엄청나게 밝은 빛이 온 도시에 퍼졌고 이 빛으로 인해 실명한 사람도 있었으며 손으로 빛을 가리니 손에 뼈가 보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한 리틀 보이가 터진 곳의 온도는 약 4,000도에 달해 근처의 모든 것을 증발시켰습니다. (참고로 태양의 표면 온도가 약 6,000도 입니다.)

이 때 열로 인해 물체가 타버린 검은 흔적이 남는데 이를 원폭 그림자라고 합니다.

뒤이어 엄청난 충격파로 인해 최대 340m/s에 달하는 엄청난 폭풍이 주변 1.6km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충격파에 이어 폭격 후폭풍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폭격으로 인해 불길이 일어나면 뜨거워진 대기는 상승하고 아래쪽에는 부분적으로 진공상태가 됩니다. 이를 메꾸기 위해 외곽의 찬 공기가 빠르게 덮쳐 오는데 이때 불씨를 합쳐 대규모 화재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상황은 말그대로 지옥 그차체였다고 합니다.

높은 열로 인해 도시 전체가 초고온의 건식 사우나 상태였고 피부가 녹아내린 채 물을 찾는 사람들, 온몸이 불타 다리 밑으로 떨어져 불덩이처럼 산산조각 나는 사람 등 끔찍한 목격담이 넘쳐났습니다.

 

그렇게 리틀 보이가 터진 지 약 30분이 지났을 무렵 하늘에서는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생명체에게 치명적인 방사능 비였지만 사람들은 너무 건조해진 대기 탓에 목마름이 극에 달해 있었고 절대 먹어선 안 되는 이 검은 비를 입을 벌려 받아 먹고 있었습니다.

원폭 피해의 사진

리틀 보이가 터진 지 몇 시간이 지난 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방사능에 노출된 증상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카락이 빠지거나 코와 입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죠. 그리고 입에서는 쇠 맛이 났고 토할 것 같이 엄청나게 메스꺼움도 느꼈습니다. 심한 사람은 백혈병의 증상이 나타나는 사람도 있었죠.

 

하지만 이미 폭발로 인해 히로시마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 90%는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생존자들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신음하고만 있었습니다.

 

리틀보이 핵폭탄이 터진 후

일본은 원폭 투하 다음날인 8월 7일 히로시마에 조사단을 파견하여 그 소식을 전해들었지만 일본 군부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여전히 항복에 대한 모습을 보이기는 커녕 어벙벙한 상태로 그럴 리가 없다며 여전히 미국에 대항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죠.

 

하지만 얼마 안 가 일본도 히로시마에 투하된 폭탄이 원자폭탄이라는 것을 트루먼 대통령의 공식 성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일본 내부에서도 천왕제를 유지한다는 조건만 붙이고 항복하자고 주장하는 화평파와 연합군이 일본을 점령해도 무장해제와 전범 재판은 일본이 직접 할 것이라는 조건이 반드시 붙어야 항복한다는 정신나간 강경파가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복 선언은 계속 지체되었습니다.

 

나가사기 핵폭탄 투하 - 리틀보이보다 강력한 팻맨의 투하

이렇게 항복 선언이 지체되자 미국은 아직 정신을 못차린 일본에게 두번째 폭격을 준비합니다. 1945년 8월 9일 오전 나가사키에 두번째 핵폭탄인 팻맨을 투하했습니다. 사실 애초에 목표는 고쿠라였지만 기상상황이 악화하여 목표지점을 확인 할 수 없어 급하기 나가사키로 변경하여 나가사키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떨어진 팻맨은 리틀보이 보다 훨씬 강력한 폭탄이었지만 피해는 히로시마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그 이유는 비교적 평탄한 지역인 히로시마와 달리 나가사키는 인구도 상대적으로 적고 지형도 산지 지형이라 산과 계곡들이 막아준 덕택에 폭탄의 위력이 반감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가사키의 절반 이상이 팻맨에 의해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리틀보이와 팻맨

원자폭탄 두 방을 연달아 맞은 일본은 더 이상 미국을 상대로 저항이 불가능하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되었고 한 발밖에 없는 줄 알았던 원자폭탄이 연달아 또 터지자 다음 차례는 교토에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결국 무조건 항복하기로 합니다.

 

원자폭탄이 터진 후 반응

일본 작품에서는 미국 장병들이 핵폭탄을 터트린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는 장면이 종종 표현됩니다만 사실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미국은 핵폭탄으로 인해서 전쟁이 끝났다고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또한 당시 일본의 전쟁방식인 반자이 돌격이나 카미카제 등 제 3자의 눈에는 너무 기괴했고 끔찍했습니다. 이러한 자국민을 희생하는 방식이 미국인 입장에서 볼때는 엄청난 반감을 일으켰고 일본이 항복한 것은 나치가 항복한 것과 똑같은 수준의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특히 원폭 투하를 한 폴 티비츠도 2005년 원폭 60주년을 맞아 '원폭은 필요했으며 죄책감이 없다.'며 똑같은 상황이 된다면 똑같이 할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원폭 개발에 종사한 과학자인 해롤드 에그뉴 박사는 일본인 피폭 생존자들이 찾아와 사과를 요구한 적이 있는데 이에 단호하게 '진주만을 잊지 마라' 며 사과를 거부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반응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일본이 핵을 맞지 않을 기회는 최소 2번 이상 있었고 히로시마 원폭 이후에도 빠른 항복을 했다면 나가사키까지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사건 이후에 자신들의 피해만 주장하고 자신들이 선제 공격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으니 미국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것입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