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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터 섬

 

이스터 섬은 화산 폭발로 인해 생겨난 화산섬인데 서울 면적의 4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육지랑은 워낙 떨어져 있어 세상의 끝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초기에 이 섬에는 거대한 야자수 나무 약 1억 그루가 섬 전체를 뒤덮고 있었고 화산 폭발 덕분에 토양이 비옥하기까지 해서 나무와 곡식들이 자라기에 너무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이렇게 비옥한 땅에 약 50명의 폴리네시아인이 인류 최초로 발견하게 됩니다.

원주민들이 처음 정착했을 때의 섬은 숲이 울창하고 식생이 풍부했으며 이러한 자연을 가지고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왔습니다. 이들은 섬의 평화를 기리기 위해 모아이를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인구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부족한 경쟁이 심화되면서 지배층들은 가장 눈에 잘 띄는 모아이 석상으로 그들의 힘을 과시하였습니다.

 

실제로 초기 석상 크기는 4m에 불과했지만 이것을 점점 크게 제작하면서 무려 20m 높이에 무게 90ton에 달하는 큰 모아이를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석상의 수는 수백 개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작은 섬은 모아이로 가득해져 갔습니다.

 

모아이 석상에 대한 궁금증

 

하지만 어마어마한 석상을 고도의 발전된 기술이 없던 원주민들이 해안으로까지 직접 옮겼다는 것인데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 거대한 석상을 만들고 옮겼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두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우선 첫번째 가설은 나무를 잘라 썰매처럼 끌었다는 것입니다. 

 

나무를 레일처럼 깔아 거대한 석상을 높인 후 이것을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의 땅이 평평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십 톤에 달하는 석상을 올려놓으면 나무의 지지력이 약해 뚝 부러지는 일이 허다했을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두 번째 가설은 밧줄을 묶어 이동시키는 방법입니다.

 

가설을 증명하는 연구원들

이는 석상을 밧줄로 묶은 뒤 양쪽에서 교대로 잡아당기면 모아이 석상이 마치 앞으로 걷는 듯이 옮겼다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원주민의 옛날 이야기에 따르면 모아이는 마술처럼 마치 살아서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스터 섬의 언어 중에는 다리 없이 뒤뚱뒤뚱 걷는 것을 의미하는 '네케네케'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실제로 이 이야기를 들은 한 연구팀은 약 5톤 짜리의 모아이 복제품을 만들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실험을 하였는데 40분 동안 약 100m를 옮기는 데 성공합니다. 이로써 연구팀은 주민들이 석상 하나를 1km로 옮기는 데 단 하루면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심지어 부서지고 버려진 석상들이 대부분 비탈진 도로 구간에서 발견이 되었고 내리막길에서 발견된 석상들은 마치 걷다가 넘어진 것처럼 얼굴이 땅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스터 섬의 멸망

이스터 섬은 초기에는 울창한 섬으로 둘러쌓여 있었지만 지금은 황량한 땅과 석상만 놓여있습니다. 

 

  50명으로 시작된 인구는 최대 17,000 명까지 증가하여 인구가 포화 상태가 되자 식량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농경지를 추가로 개간하고 더 많은 배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나무가 사용되었고 점점 자원이 고갈되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스터 섬이 황폐해진 이유는 인간의 벌채만이 아니라 사람이 정착할 때 같이 유입된 폴레네시아 쌀쥐에 의한 것이 크다고 합니다. 

 쥐를 들여온 이유는 원주민들이 쥐를 식용으로 길렀기 때문인데 천적이 없는 잡식성 쥐가 땅에 떨어진 모든 씨앗을 먹어치우면서 점점 나무가 싹을 틔우지 못하는 환경으로 변해갔습니다.

 

비극의 시작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섬에 울창했던 숲과 가축 등 많은 것이 사라져버렸고 나무가 없어 배와 사냥 도구를 만들지 못해 그들의 주식이 물고기를 얻을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배고픔에 굶주린 사람들은 남아 있는 가장 커다란 고깃 덩어리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스터 섬의 쓰레기 더미에서는 사람의 뼈가 흔하게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를 방증하듯 이스터섬의 언어에는 식인에 관련된 관용 어구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상대방에게 "아침에 먹은 너의 엄마 살이 이빨에 끼었다" 라는 욕을 했을 정도라 합니다.

 

 굶주림에 지친 섬 사람들은 내부 반란과 부족한 전쟁이 일어났고 기근 식인 전쟁의 반복 속에서 17,000 명의 인구는 반 이상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이상 모아이를 숭배하지 않았고 석상을 짓지도 않았습니다.

자연 환경이 극도로 파괴되어 변변한 배 한 척도 만들 수 없게 되자 이스터 섬을 탈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늘을 나는 새 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새를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조인 마케마케"라는 새 머리를 가진 신을 믿기도 하였습니다.

 

또 다른 재앙

 1722년 유럽인 야코프 로헤베는 태평양에서 발견한 이스터 섬을 발견한 것을 시작으로 1774년 영국의 타원과 제임스 쿡이 차례로 발견하게 되고 수많은 유럽인들이 이스터 섬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이때 유럽에서는 천연두와 매독이 전 유럽을 강타하며 대유행으로 번지게 되는데 비슷한 시기에 유럽인들이 이 섬에 발을 들이는 바람에 원주민들에게 전염시키게 됩니다. 

 면역이 전혀 없었던 많은 원주민들이 이로 인해 사망하게 됩니다.

 

또한 라틴아메리카에서 온 노예 무역상들이 많은 원주민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끌고 갔고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대륙 사람들에 의해 발견된 이스터섬은 폭풍이 몰아쳤고 1877년 섬에 남아 있는 원주민 수는 고작 111명 유럽인들에겐 미지의 땅이자 폴리네시아인들에겐 풍요의 섬이었던 이곳은 이제 죽음의 섬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스터 섬의 근황

죽음이 섬이 되어 많은 원주민이 없어진 이스터 섬을 칠레가 돈벌이를 위해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섬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스터 섬의 모아이가 크게 유명해지면서 그 유명세로 관광업이 흥하자 칠레 이주민들이 이곳에 와서 사업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칠레 이주민들이 세운 가게에서 파는 농산물은 이스터 섬에서 기른 것이 아닌 수입한 것이며 모아이 기념품 또한 원주민이 만든 것이 닌 칠레 이주민들이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기존에 살던 원주민들은 칠레 이주민들에게 밀려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현재 원주민들은 칠레 이주민들과 경제적 격차와 차별적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으며 국제사회의 독립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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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발생

1985년 8월 12일 도쿄에서 오사카로 향하는 일본 항공 123편이 524명의 승객을 태우고 이륙했습니다.

하지만 이륙 후 1시간 만에 비행기는 추락하여 탑승 인원 524명 중 520명이 사망하고 4명이 생존합니다. 

사망자 중 한국인은 6명이었으며 단일 항공기 사고로는 최악의 사고입니다. 

더욱 더 안타까운 점은 사망자 중 대부분은 추락 이 후 정부의 늦은 대응 때문에 사망했다는 점입니다. 

 

추락 당시 비가 내리고 있어 추락한 기체가 2차 폭발을 일으키지 않았고,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이 추락 현장에 생존해 있었습니다. 당시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잔해 속에서 죽어가던 희생자들의 비명 소리가 밤새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항공기 추락 현장

하지만 구조 활동이 시작되는 다음날 9시가 되기 전 승객 상당수는 추운 밤을 견디지 못하고 저체온증으로 숨지게 된 것입니다.

 

당시 상황

이륙하고 항공기가  7,300m에 도달하였을 때 기내에서 엄청난 폭발 소리가 들립니다.

기장은 긴급 상황임을 직감하고 긴급 사태를 의미하는 스쿽 7700 발신을 시작합니다.

 

폭발 후 항공기는 완전환 조종 불능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폭발 직후 비행기가 상하로 요동치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기장은 긴급 강화를 시도하면서 회항을 요청하였습니다.

 

비행기는 좌우로 매우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기압이 낮아지자 객실에서는 자동으로 산소 마스크가 승객 좌석에 내려왔습니다. 사무장은 산소 마스크와 벨트를 착용하라는 방송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상황

이 사진은 사고 당시 한 승객이 산소 마스크가 내려온 모습을 찍은 사진인데 일본 항공 123편의 마지막 기내 모습입니다. 이 상황에서 약 17분간 상공 6,000m에서 비행을 계속하였고 이후 오른쪽으로 급선회하면서 단번에 상공 4600미터까지 하강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체는 군마현 산악지대로 향하기 시작합니다.

 

조종사들은 더 이상의 방향 조절이 불가능해지자 급기야 날개에 달린 플랙과 엔진의 출력을 조절하여 방향 전환을 시도합니다. 이 때 기장은 추락하기 직전의 상태인 스톨에 걸릴 것을 주의하라고 합니다.

산악 지역에 들어온 항공기는 더 이상 고도가 상승되지 않았고 산에 부딪힐 듯이 고도가 낮아졌습니다. 123편은 계속해서 하강하였고 급기야 대지 접근 경보 장치가 작동했습니다.

경보 장치가 울리고 9초 뒤 오른쪽 주 날개가 수목과 부딪힙니다. 속도는 시속 640km에 도달했고 수목과 접촉한 3초 뒤 비행기는 그대로 산에 충돌하고 맙니다. 기장의 마지막 말은 이젠 끝이야라는 절박한 고음 소리였습니다

 

 

사고의 원인 

 추락한 항공기는 7년 전에도 한 번 사고를 일으켰는데 오사카 공항에 착륙 도중 기수를 너무 드는 바람에 테일 스트라이크 즉 꼬리 날개가 바닥에 부딪혀 후미에 손상을 입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고 후 보강판 수리가 부실하게 이루어졌으며 느슨했던 나사는 계속된 비행에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빠져나가 버린 것이었습니다. 

사건 당시 항공기 확대사진

위의 사진의 검은색 실선은 원래 있어야 하는 꼬리날개의 형상을 그린 것입니다.

이걸 보면 알 수 있듯 수직 꼬리 날개 전체가 없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비행기의 방향을 조절하는 수직꼬리 날개가 날아가 버렸고 유압 분배기가 터지면서 조종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심지어 이 비행기는 사고 직전까지 화장실 문이 잘 닫히지 않는다든지 바람이 새어든다든지 휘파람 소리가 나는 등 결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언젠가는 사고가 날 것을 암시하는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사고 그 이후

 

이후 일본 항공은 한화로 70억 원 정도를 조의금으로 지급했고 회장은 퇴임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실한 수리로 520명의 목숨을 앗아가게 한 정비 총 담당자는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녹음 파일이 공개되기 전까지 대부분의 여론은 기장에 대한 비난으로 쏟아졌고 그의 가족은 비난의 전화를 수없이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수년이 지나고 녹음 파일이 공개되자 조종사들이 사고 직전까지 필사적으로 노력했다는 사실을 인정받았습니다.

사고 지점에는 희생자를 위한 추모공원이 건립되었으며 이곳에서는 아직까지도 사고기의 잔해 부품이 발견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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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르 봄바가 세상에 나온 배경

 

냉전 시대의 소련이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원자 폭탄 리틀 보이와 팻맨을 보고 앞으로의 전쟁에서 가장 유효하고 강력한 무기가 핵폭탄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1961년 7월 10일 소련의 니키타 총리는 핵 개발 학자들에게 16주 안으로 초강력 폭탄을 개발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미국의 핵폭탄보다 강력한 폭탄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부분을 리셋해야했기에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폭탄을 설계했습니다.

미국의 방식이 핵분열 방식의 폭탄이었고 소련은 핵융합 방식의 설계를 선택했습니다.

핵융합 즉 수소 폭탄은 방사능으로 인한 피해는 거의 없으면서 그 파괴력은 핵분열 폭탄보다 훨씬 강력했습니다.

그렇게 16주 후 짧은 기간안에 차르봄바라는 초강력 폭탄이 완성됩니다.

 

차르봄바의 위력

 

완성된 폭탄의 위력을 파악하기 위해 1961년 10월 30일 안드레이 체프 소령은 27톤의 차르봄바를 수송하기 위해 폭격기에 탑승했습니다. 안드레이는 폭격기를 고도 10 KM까지 상승 시킨 후 차르 봄바를 투하했습니다. 폭탄은 800KG 에 달하는 낙하산을 단 채로 투하되었는데 그 이유는 낙하산으로 인해 차르 봄바의 낙하속도를 최대한 늦추고 터지기 전에 안드레이가 최대한 멀리 도망가야했기 때문입니다.

상공 4KM 부근까지 폭탄이 투하되자 내장되어 있던 기압 센서 퓨즈가 작동하여 차르봄바가 폭발했습니다.

그 폭발력은 무려 50MTon으로 일반적인 TNT 폭탄 5천8백만 톤을 터뜨린 것과 비슷한 위력이었습니다. 이는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한 리틀보이의 3,500배나 달하는 파괴력입니다. 터지는 순간 발생한 에너지는 1.4초 동안 전 지구에 닿는 모든 태양 에너지를 합친 것과 비례했습니다.

실험 장소 금방 35킬로미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백 킬로미터 범위까지 3도 화상을 입을 수 있는 강력한 열이 발생하였으며 폭발로 인한 섬광은 천 킬로미터 떨어진 핀란드에서도 관찰되었습니다.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 체결?

 

이 실험을 본 미국은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기술력이라면 미국도 뒤쳐지지 않았지만 이런식으로 폭탄 경쟁으로 치닫다가는 정말 한방에 인류를 끝장 내버릴 무기가 탄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미국은 핵실험 금지 조약에 서명을 하였고 이 후 유엔 총회에서는 모든 장소에서, 어떠한 핵실험도 금지한다는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이 발표되지만 많은 나라들이 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북한을 포함한 몇몇 나라는 서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은 갖은 이유들로 인해 26년째 발효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하며 주변국들에게 핵카드 까지 언급하며 협박을 가하는 상황입니다.

러시아는 무려 4500개의 핵탄두를 비축한 나라입니다.

5400개 정도의 핵을 가진 미국과 비교해 보아도 대등한 수준입니다. 러시아는 소련 시절 이미 차르 봄바를 만들었던 기술이 있는 국가로써 60여 년이 흐른 현재는 그 핵 기술들이 일반인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뛰어 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러시아 뿐만이 아니라 핵을 보유한 모든 나라들에 해당될 수 있는 이야기이며 만약 전쟁이 핵전쟁으로 치닫는다면 그것은 정말 인류의 마지막 전쟁이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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