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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물탱크 주부 살인 사건 

2002년 6월 5일, 충북 청주시 흥덕구의 한 다세대 주택에서 강씨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아들 송군이 집에 돌아왔을 때, 집안은 난장판이었고 어머니 강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2002년 실종된 강정숙

집안은 전화선이 뽑혀 있고 부엌에는 저녁 준비 도중인 재료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강씨의 가족들은 강씨의 실종을 걱정하며 기다렸으나, 강씨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실종 23일째 되던 날, 강씨의 시신은 건물 옥상 물탱크실에서 심하게 부패된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숨겨진 진실: 범인의 동기와 용의자

2-1. CCTV에 찍힌 용의자

강씨의 카드가 사용된 은행의 CCTV에는 20대에서 3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 강씨의 카드를 사용하여 현금을 인출하는 장면이 찍혔습니다.

cctv에 찍힌 범인의 모

이 남성은 작은 키에 다부진 몸매를 가졌고, 모자를 쓰고 큰 코가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상을 통해서는 범인의 신원을 확실히 알 수 없었고, 범인의 얼굴이 흐릿하게 찍혀 있어 경찰은 이를 통해 범인을 특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2-2. 가족이 범인 아니야??

사실 초기에는 경찰은 처음에 강씨의 남편 송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습니다.

우선 강씨의 카드 비밀번호를 알고 있기도 했고, 90%이상 아는 사람의 범행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송씨는 사건 당시 알리바이가 입증되었고, 그는 교통사고로 인한 중증 지체 장애를 가지고 있어 범행을 저지르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아들 송군과 딸 송양 역시 사건 당시 학교에 있었으며, 어머니 실종을 처음 발견하고 신고한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알리바이가 확실하여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미궁 속으로: 범인을 왜 잡지 못했는가?

경찰이 범인을 잡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사건 초기 경찰은 강씨의 실종을 단순 가출로 판단하며 초동 수사에 실패했습니다. 강씨의 핸드폰이 청주 시내를 돌아다닌 흔적과 은행에서의 현금 인출 기록을 무시한 채, 중요한 단서를 놓쳤습니다. 또한, 물탱크까지 가는 경로에 대한 CCTV가 없거나 작동하지 않아 범인의 이동 경로를 추적할 수 없었습니다. 초기 수사에서 놓친 증거들이 사건 해결에 큰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미제로 남은 사건의 진행

강씨 살인 사건은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습니다. 2011년, 강씨의 딸이 재수사를 요청하여 청주 흥덕 경찰서가 재수사를 시작했으나, 여전히 진전은 없는 상태입니다. 2021년에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이 19년 만에 CCTV에 찍힌 용의자의 얼굴을 공개하며,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습니다. 흐릿하게나마 남아 있는 CCTV 속 용의자의 얼굴이 언젠가는 진범을 찾는 단서가 되기를 바라는 가족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경찰의 초기 수사 실패와 증거 부족으로 인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지만, 가족들은 여전히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강씨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고 범인이 잡히는 날이 오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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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수호자, 비극의 희생양 세스닉 수녀

1969년 11월 7일,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서 캐서린 세스닉 수녀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녀는 키어 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 중이었으며, 선물을 사러 외출했다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피해자 세스닉 수녀

두 달 후인 1970년 1월 3일, 사냥을 나온 한 가족에 의해 세스닉 수녀의 시신이 외딴 숲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부검 결과, 그녀는 두개골 골절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당시 경찰은 여러 명의 용의자를 조사했으나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해 사건은 미제로 남았습니다.

 

범인은 누구?

세스닉 수녀의 죽음과 관련하여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조셉 매스컬쳐 신부였습니다. 

 1. 여러 수녀들의 증언

여러 피해자들은 조셉 신부가 자신들을 성폭행하고 협박했다고 증언했습니다.

한 피해자는 고해성사에서 친족 성폭행 사실을 고백한 이후 그것을 빌미로 조셉 신부의 타겟이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2. 시신 목격

한 졸업생은 세스닉 수녀가 실종된 후 조셉 신부가 자신을 차에 태우고 세스닉 수녀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고 증언했습니다.

조셉 신부는 이 시신을 가리키며 "이 사실을 발설할 경우 너도 이렇게 될거다." 라는 협박도 했다고 합니다.

 

3. 수상한 방문 기록

세스닉 수녀가 실종되기 전날, 조셉 신부와 매그너스 신부가 캐리지 하우스를 무작정 방문한 기록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세스닉 수녀의 실종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높였습니다.

 

신부가 체포되지 않았던 이유

그렇다면 이렇게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았는데 왜 체포되지 않았던 것일까요??

 

1. 물리적 증거 부족

위에서 언급된 것은 말그대로 정황증거일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사건 발생 후 두 달이 지나 시신이 발견되어 물리적 증거 확보가 어려웠고 이는 법적으로 유죄를 입증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2.신부의 강력한 영향력

당시 조셉신부는 경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동생이 경찰 소장으로 재직 중이었기 때문에 수사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죠...

또한 가톨릭 교회의 강력한 권위와 신부의 사회적 압박은 수사와 기소를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거기에다 사건 당시 피해자들은 공식 석상에서 이러한 신부의 범죄 정황을 증언하기를 매우 두려워 해서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고 합니다.

 

침묵의 대가

볼티모어 대교구는 조셉 매스컬쳐 신부의 성범죄 혐의와 관련하여 피해자들에게 합의금을 지급했습니다.

조셉신부의 범죄 사실이 공식화 된 것은 아니지만 뒤로 들은 피해자들의 이야기들이 너무 일관성이 있고 신빙성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도의적 책임을 느낀 대교구에서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지급했을 수도 있지만 당시 카톨릭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이 사건을 최대한 조용히 덮고 넘어가려고 지불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 : 사건 그 이후

세스닉 수녀 살인 사건은 2017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천사들의 증언"을 통해 다시 조명을 받았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담아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는 노력을 다루고 있습니다.

조셉 매스컬쳐 신부는 2001년에 뇌졸중으로 사망했으며, 사건은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습니다. 세스닉 수녀의 죽음은 많은 의문을 남긴 채,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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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980년대 후반 일본을 공포에 몰아넣은 '오타쿠 살인마' 미야자키 츠토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미야자키 츠토무의 유년기

미야자키 츠토무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성장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숙아로 태어나 희귀병인 '선천성 요척골 유합증'이라는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뉴스에 나온 츠토무의 면상

이는 요골과 척골이 붙어있는데 쉽게말해 손바닥을 뒤집을 수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학창시절에는 동급생으로 부터 왕따를 당했고, 취업을 해서는 직장 동료들로부터 끊임없는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미야자키는 점점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되었고, 애니메이션과 만화에 심취하게 되면서 오타쿠로 변모했습니다.

 

범죄자가 된 계기 - 친할아버지의 죽음

미야자키 츠토무가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유일하게 믿고 따르던 할아버지의 죽음이었습니다. 1988년, 그의 할아버지가 사망하자 미야자키는 깊은 상실감에 빠졌습니다.

할아버지는 미야자키에게 유일한 정신적 지주이자 정서적 지원을 제공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미야자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우연히 만난 어린 소녀에게서 위로를 받았고, 이 경험이 그에게 왜곡된 집착을 심어주었습니다. 이후 그는 어린 소녀들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으며, 이는 연쇄 살인으로 이어졌습니다.

 

잔혹한 범죄들

1988년부터 미야자키는 어린 소녀들을 납치하고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은 그의 주요 범죄들입니다.

 

1. 첫 번째 범죄

1988년 8월 22일, 사이타마현에서 네 살배기 소녀 곤노 마리를 납치하여 하치오지시의 숲으로 끌고 가 살해했습니다. 이후 시신을 성폭행하고 그 과정을 비디오로 촬영했습니다. 시신의 일부를 절단하여 보관하고 나머지는 화장 후 유기했습니다.

 

2. 두 번째 범죄

 1988년 10월 3일, 초등학교 1학년 여아를 납치하여 숲으로 끌고 가 살해한 후 성폭행했습니다. 이 사건에서도 미야자키는 시신을 유기했습니다.

 

3. 세 번째 범죄

 1988년 12월 9일, 네 살배기 여아를 납치하여 성폭행하고 살해했습니다. 그는 시신을 유린하면서 그 과정을 비디오로 기록했습니다. 이후 피해자의 가족에게 엽서를 보내며 자신의 범행을 과시했습니다.

 

4. 네 번째 범죄

1989년 6월 6일, 도쿄도 고토구 아리아케 테니스 공원 근처에서 다섯 살배기 여아를 납치하여 살해했습니다. 그는 시신을 유린하고 비디오로 촬영했습니다. 경찰에 체포된 후 미야자키는 시신의 일부를 먹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허위 진술로 밝혀졌습니다.

 

드디어 잡힌 악마 오타쿠

경찰의 수사는 초기에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89년, 미야자키가 또 다른 어린 소녀를 성추행하는 현장에서 붙잡히면서 그의 범죄 행각이 드러났습니다. 경찰은 그의 집에서 수천 개의 비디오 테이프와 범죄를 증명하는 자료들을 발견했습니다.

 

미야자키의 재판은 그의 정신 상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는 다중 인격을 주장하며 자신의 행위를 부인했지만, 심리학자들은 그가 자신의 행위를 인지하고 있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미야자키는 1997년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이는 여러 차례의 항소 끝에 확정되었습니다.

 

사건 그 이후 

1. 가해자 가문의 박살

일본은 이런 극악범죄가 나오면 범죄자 뿐 아니라 범죄자 가족까지 괴롭히는 것이 심각했습니다.

츠토무의 아버지는 아들의 체포 이후 한번도 재판에 나오지 않았으며, 변호인을 구해달라는 아들의 부탁도 거절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국선변호사를 쓰게 되었는데 이는 국민의 세금이라며 일본 언론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물론 사선변호인을 썼으면 썼다고 비난을 받았을 듯합니다.

 재판이후 츠토무의 아버지는 동생과 딸들을 위해 이혼하여 자녀들이 외가 성을 따르도록 하고, 1994년 11월 20일

피해자들의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집과 재산을 매각하고 타마가와 강 다리에서 투신했습니다.

 

나머지 가족들도 이미 신상이 노출되어 다니던 직장 및 대학교를 그만두게 되었고, 결혼 예정이 되어있던 여동생들은

스스로 파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억울하게 츠토무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나, 생긴게 범죄자와 비슷했던 사람들도 피해를 입었다고 하네요.

 

2. 오타쿠 이미지 나락

'오타쿠 살인마' 사건은 일본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안그래도 좋은 시선이 아니었던 애니를 보는 사람들 즉, 오타쿠 문화에 대한 두려움과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는 애니메이션과 만화 애호가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일본 문학에도 영향을 미쳐 여러 소설의 영감이 되었습니다. 미야자키의 범죄 행위는 인간의 어두운 면모와 사회적 소외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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