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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황동 엠블렘

2013년 1월 21일, 독일 하노버에 위치한 유명 과자 제조업체 발센(Bahlsen Gmbh) 본사에서 황동 재질의 엠블렘이 도난당했습니다. 이 엠블렘은 금으로 도금된 비스킷 모양의 항동 재질로, 본사 외부에 100년 동안 걸려있던 상징물이었습니다. 사건 초기에는 엠블렘이 사라진 지 며칠 후에야 직원들이 알아차렸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발센 측은 이 엠블렘이 사라진 줄 몰랐다가 직원의 발견으로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발센은 발칵 뒤집혔고, 회사의 사장은 범인을 잡아오는 사람에게 1,000 유로의 현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쿠키 몬스터 탈을 쓴 범인

범인이 보낸 편지와 사진

1월 28일, 독일 각 신문사와 과자 회사에는 의문의 우편이 배달되었습니다. 우편에는 쿠키 몬스터 인형 옷을 입은 사람이 엠블렘을 먹는 포즈로 찍은 사진과 함께 협박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범인은 자신을 세서미 스트리트의 캐릭터 쿠키 몬스터라 자칭하며, 발센이 어린이 병원에 쿠키를 선물하고, 동물 보호소에 현상금을 기부하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쿠키 몬스터 절도 사건'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사건의 결말과 그 여파

엠블럼의 귀환

발센은 범인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정하고, 범인은 엠블렘을 라이프니츠 대학교 내 말(馬) 동상의 목에 걸어놓았습니다.

돌려받은 엠블럼

경찰은 엠블렘에서 범인의 단서를 찾기 위해 조사했지만, DNA나 지문 같은 어떤 단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엠블럼은 진품으로 확인되었고, 다시 발센으로 돌아왔습니다. 발센은 약속대로 52,000개의 쿠키를 어린이들에게 기부했습니다.

 

 

미스테리로 남은 사건: 자작극 가능성

이 사건이 커지면서 일부에서는 발센의 자작극일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발센은 이 사건으로 큰 홍보 효과를 얻었고, 일부 사람들은 이것이 고도의 마케팅 전략일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발센의 회장은 수사가 종결된 후에도 엠블럼을 원래 자리 대신 안전한 곳에 보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쿠키 몬스터와의 인터뷰: 정체는 여전히 미궁

독일의 한 방송국은 쿠키 몬스터와의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그는 전신을 가린 상태로 인터뷰에 응해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사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그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결국, 쿠키 몬스터 절도 사건은 미해결 사건으로 남아, 많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경찰의 태도와 사건의 여파

경찰은 사건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범인을 잡으려 하지 않았고, 엠블럼이 무사히 돌아온 후 수사를 중단했습니다. 이로 인해 경찰도 이 사건으로 인한 손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발센은 이번 사건을 통해 큰 홍보 효과를 얻었고, 사건 자체는 웃음과 훈훈한 마무리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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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3월,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에서 글리코의 사장인 에자키 글리코가 총으로 무장한 괴한들에게 납치됩니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글리코라는 대기업 사장의 납치 사건으로 인해 더욱 주목받았습니다.

 

사건의 구성 

1. 납치 사건의 발생

우선 범인들은, 에자키 글리코의 집에 침입해 그의 아내와 딸을 묶어두고, 욕실에서 목욕 중이던 에자키 글리코를 납치했습니다. 아내는 괴한들이 떠난 후 간신히 줄을 풀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2. 범인들의 몸값 요구 

납치 후, 범인들은 글리코 본사로 전화를 걸어 현금 10억 엔과 금괴 100kg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글리코 측은 경찰에 협조하여 범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협박범들의 통화와 요구를 면밀히 분석하고 대응 전략을 세웠습니다.

 

3. 에자키 글리코의 탈출

납치된 지 약 3일 후인 3월 21일, 에자키 글리코는 오사카부 세치시에 위치한 한 오두막에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범인들이 감시를 소홀히 한 틈을 타 에자키 글리코는 스스로 탈출하여 근처의 역으로 도망쳤습니다. 역에서 그는 일본 국유철도 직원에게 발견되어 경찰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협박과 방화, 이어지는 위협

납치 사건 이후, 글리코 본사에 협박장이 도착했습니다. 범인들은 현금 6천만 엔을 요구하며, 지정된 장소에서 경찰의 잠복 작전을 피해 도주했습니다. 그 후, 글리코 본사와 영양식품 창고에 방화 사건이 발생하며, 사회적 불안이 극도로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단순한 납치나 협박 이상의 조직적 범죄임을 시사했습니다.

 

협박의 확대

범인들의 협박은 글리코 본사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루다이 식품, 하우스 식품 등 여러 대기업이 연달아 협박을 받으며, 일본 식품 산업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범인들은 청산가리를 제품에 넣었다는 협박장을 보내며 소비자들의 공포를 조장했고, 실제로 오사카와 교토의 슈퍼마켓에서 독극물이 든 제품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범인들의 목적은 도대체 뭐야?

범인들의 목적이 명확하게 돈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협박장과 요구 사항들이 단순히 금전적인 이익을 얻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추측 범인의 몽타

예를 들어, 10억 엔과 금괴 100kg을 요구한 것은 현실적으로 이동과 도주가 어려운 금액과 무게였습니다. 또한, 범인들은 여러 차례 협박과 방화를 통해 기업을 위협했지만, 실제로 큰 금액을 손에 넣지 못했습니다. 이는 범인들의 목적이 돈보다는 기업과 사회에 혼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경찰은 도대체 뭘하나??

경찰들이 이렇게 큰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범인들의 치밀함

범인들은 매우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했습니다. 여러 차례 장소를 변경하며 경찰을 따돌렸고, 녹음된 목소리와 가짜 지시문 등을 사용해 경찰의 수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2. 경찰의 실수와 자원 부족

경찰은 몇 차례 범인을 체포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목격된 용의자를 체포하지 못한 이유는 상부의 지시 부족과 현장에서의 실수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여러 차례 수사를 벌였지만 범인을 잡지 못하는 과정에서 자원과 인력이 부족해졌습니다.

 

3. 사회적 압박과 혼란

사건이 장기화되면서 사회적 불안과 압박이 높아졌습니다. 경찰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지만, 범인들은 이를 이용해 더욱 교묘한 방법으로 경찰을 따돌렸습니다.

 

결과적으로, 글리코 모리나가 사건은 일본 경찰 역사상 가장 큰 미해결 사건 중 하나로 남아 있으며, 범인들의 정체와 목적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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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여대생 사망 사건

1998년 10월 16일, 대구의 한 대학에 재학 중이던 정은희 양은 학교 축제 기간 동안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밤 10시 30분쯤, 피곤해하는 남자친구 피군을 배웅하며 캠퍼스 교문을 함께 나섰습니다. 그러나 약 30분 후, 피군은 병원 앞에서 홀로 깨어났습니다.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피군은 은희 양에게 연락을 시도했으나 응답이 없었고, 그녀가 혼자 집에 갔을 것이라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의문의 교통사고와 답답한 경찰의 초동 수사

다음날 새벽 5시 10분경, 대구 달서경찰서에 한 화물 트럭 운전자로부터 교통사고 사망 신고가 접수되었습니다. 화물 트럭 운전자 최씨는 한 여성이 고속도로 중앙 분리대를 넘어 무단횡단을 하다가 트럭에 치여 사망했다고 신고했고, 그 여성은 바로 정은희 양이었습니다. 경찰은 이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규정하고 수사를 종결했으나, 유가족은 경찰의 미흡한 수사에 의문을 제기하며 재수사를 요청했습니다. 정은희 양이 사망한 고속도로는 그녀의 평소 생활 반경과 거리가 멀었으며, 사고 당시 술에 심하게 취해 있지도 않았습니다.

 

유가족의 의문과 발견된 증거

유가족은 은희 양의 사망 경위에 대해 많은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특히 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은희 양의 속옷은 성폭행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속옷이 은희 양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유가족은 경찰의 부실한 수사를 비판하며, 속옷에 대한 국가수 감정을 요청했습니다. 이후 경찰은 사건을 교통사고로 서둘러 종결했으나, 유가족은 지속적으로 재수사를 요구하며 60여 차례의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2013년, 검찰은 정은희 양의 속옷에서 스리랑카 남성 케인의 DNA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5년만에 잡힌 용의자 케

검찰의 재수사에 따르면, 사건 당일 케인과 그의 동료들은 술에 취한 정은이 양과 피군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자전거에 정은이 양을 태우고, 고속도로 아래 굴다리 근처로 끌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케인과 그의 동료들은 피해자를 집단 성폭행했고, 현금과 학생증을 빼앗은 후 현장을 떠났습니다. 겁에 질린 은희 양은 고속도로로 향해 도움을 청하려 했으나, 중앙 분리대를 넘다가 트럭에 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피해 재연

남자친구는 뭐했나..?? 

남자친구 피군은 사건 당일 정은이 양과 함께 있었으나, 병원 앞에서 홀로 깨어난 이후 여자친구의 행방을 알지 못했습니다. 피군은 당시의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고 진술했으며, 경찰 조사에서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검찰은 결국 케인을 스리랑카로 추방시키고, 스리랑카 법원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했습니다.

스리랑카에서의 강간죄 공소시효가 20년이기 때문에, 검찰은 신속하게 사법 공조를 통해 케인을 기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정은이 양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많은 의문을 남기고 있습니다. 유가족은 정은희 양의 사망 경위와 관련하여 여러 의혹을 품고 있으며, 경찰의 초기 수사 실패와 허위 진술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유가족과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아쉬움과 분노를 남기며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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