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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스-헤커 광산 : 축복받은 광산

1840년대 미시간주에서 대량의 호상 철광층이 발견되었습니다.

 

1. 뛰어난 채산성

이 지역의 철광맥은 채산성이 높고 입지 조건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당시 고속도로와 철도 인프라가 완벽하게 갖춰지지 않아 채굴한 광물을 운반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미시간주에서 발견된 광맥은 오대호 근처에 위치해 물길을 따라 대량의 광물을 손쉽게 운송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채굴과 운송을 더욱 효율적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2. 완벽한 위치

광산 근처에는 토론토, 디트로이트, 시카고 등 주요 도시들이 위치해 있어, 이러한 도시들은 광산의 철광석을 사용하는 주요 소비처가 되었습니다. 많은 광산 회사와 광부들이 미시간으로 몰려들었고, 이 광맥은 미국 내에서 생산되는 철광석의 약 50%를 담당할 정도로 중요한 광산이 되었습니다. 미시간주의 풍부한 철광석 자원은 이 지역을 미국 철강 산업의 중심지로 성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3.가장 안전한 광산

반스-헤커 광산은 당시 만연했던 사건 사고 속에서도 가장 안전한 광산 중 하나로 평가받았습니다.

철저한 안전 수칙과 최신 장비를 도입해 광부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했습니다. 예를 들어, 발파 작업 전에는 지하 공동의 물을 먼저 제거하는 등의 철저한 사전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반스-헤커 광산은 300m 이상의 깊이에서도 무사고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사건의 발생 

1926년 11월 3일, 광부 51명이 광산 안으로 투입되어 평소처럼 채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발파 작업자들은 며칠간의 노력 끝에 지하수로 가득 찬 공동 내의 물을 모두 제거하고,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한 후 발파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발파 후 약 10초가 지나자 광부들은 이상한 소음을 감지했습니다.

거대한 괴물이 내달리는 듯한 소음이 광산 전체를 뒤흔들었고, 곧바로 수백, 수천 톤에 달하는 물이 광산 내부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터져버린 호수

광부들은 빠르게 밀려드는 물과 함께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지하 공동에서 제거된 물은 사실 지상의 호수를 지탱하는 핵심 요소였습니다. 물이 제거되면서 공동의 압력과 질량이 사라졌고, 발파로 인한 충격까지 더해지자 지하 공동은 더 이상 호수의 무게를 지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호수의 물이 광산 내부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왔습니다.

광부들은 급격히 차오르는 물 속에서 유일한 탈출 수단인 수직 사다리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렸습니다.

그러나 초당 30cm씩 상승하는 물 속에서 어둠과 무거운 작업복, 거센 물줄기와 토사 속에서 사다리를 오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대부분의 광부들은 차가운 물 속에서 저체온증과 물의 압력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사고 후 구조대는 현장에서 생존자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윌콕스를 제외한 모든 광부들이 사망했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42명의 아내가 남편을 잃고, 많은 아이들이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반스-헤커 광산의 수몰 사고는 미시간주 역사상 최악의 광산 사고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날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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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선 '제스톤'이 전복되다. 

2013년 5월 26일 새벽, 아프리카 서해안 기니만에서 활발한 석유 시추 작업 중인 예인선 '제스톤'이 강한 태풍으로 인한 거대한 파도에 의해 전복되었습니다. 전복된 배는 30m나 되는 바다의 바닥에 쳐박혔고 그로인해 배 선실은 빠르게 물에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나이지리아 예인선 'Jascon-4'

당시 서해안 기니만은 해적들이 많기로 유명했는데 그로인해 선원들은 밤이 되면 모든 선실의 문을 잠그고 잠에 들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당시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었고 새벽에 전복된 바람에 이미 잠을 깨서 상황을 알아챘을때는 물이 많이 차올랐었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선원은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사람, 해리스 오제 그바 오케만은 배가 완전히 전복되고도 살아남아있었습니다. 

 

해리스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해리스는 배의 요리사였습니다. 요리사인 그는 항상 아침 식사준비를 위해 4:40분에 기상을 했고, 식사 전 화장실을 갔는데 마침 그 때 배가 전복이 되기 시작했었습니다.  게다가 운이 좋게 그 화장실에 자그마한 에어포켓이 생겨 잠시나마 생존이 가능한 산소를 확보하게 되었죠.

 

작은 에어포켓에서 처음 몇 시간을 보낸 후,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용감하게도 더 큰 에어포켓을 찾기 위해 움직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두컴컴하고 물에 잠긴 선내를 더듬어 가며 그는 선장실을 향해 이동했고 결국 선장실에서 더 큰 에어포켓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빛 한조각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주변에는 큰 바다생물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며 바다는 차가웠습니다. 말그대로 희망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해리스는 희망의 불씨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선내에서 발견한 드라이버와 망치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주변의 재료들을 활용해 임시 뗏목을 만들어 그 위에서 잠시 숨을 돌렸습니다. 

 

구조를 시작하다.

침몰한 예인선을 운영하던 석유회사 쉐브론은 사고를 인지한 즉시 구조 작업을 시작하고자 했으나, 강한 파도로 인해 즉각적인 구조 작업이 불가능했습니다. 또한, 다이버들을 30m 아래로 보내기 위해 감압을 도울 다이빙 배 등의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모든 준비가 완료되는 데 이틀이 걸렸습니다.

 

구조대의 목표는 사실 구조가 아니라 사체 수습이였습니다. 시체라도 수습하여 유가족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죠.

그러나 얼마 안가 해리스를 발견한 구조대들은 당황하였으나, 최선을 다해 구조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많았습니다. 이미 60시간이 흐른 상황에 해리스는 너무 지쳐있었으며, 바로 나가더라도 압력차이로 인해 장기가 터지고 잠수병에 걸릴 수 있는 상황이였죠. 

 

 구조대는 해리스를 안심시킨 후 다이빙 벨(dive bell : 사람의 압력과 바깥 공기의 압력을 맞추어주는 기계)로 이동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에어포켓에서 나가자마자 긴장이 풀리고 60시간의 피로가 한번에 몰려온 해리스는 그만 기절해버리고 맙니다

 위기는 있었지만 어찌저찌 다이빙 벨로 무사히 해리스를 이동시킨 후 거기서 3일동안 압력을 맞춘 후 해리스는 무사히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구조된 후의 해리스

당시 해리스가 지냈던 에어포켓은 2.5일 정도 지낼수 있는 크기였다고 합니다. 해리스가 60시간을 거기서 지낸것을 생각하면 구조대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큰일날뻔한 상황이었죠. 

구조된 해리스

 이런 극악상황에서 나온 해리스는 행복하게 지낼 것 같았지만 사실 그러지 못했습니다. 

 

PTSD를 겪는 해리스 

해리스는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사고 당시의 악몽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특히 밀폐된 공간이나 물가에 대한 공포감을 경험했습니다.

 물론 이 트라우마는 수년간의 훈련 끝에 IMCA 클래스 2 상업 다이버 자격증을 취득하며, 극복했다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해리스

그러나 해리스의 고향인 나이지리아에서는 그의 생존을 둘러싼 미신과 오해가 확산되었습니다. 일부는 그가 흑마술을 사용했다거나 동료를 희생시켜 자신만 생존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이로 인해 해리스는 사회적으로 고립되었고, 심지어 동료들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조차 어려워했습니다.

 

정말 다른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영웅 취급을 받았을텐데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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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요즘 뉴스보면 밝은 이야기가 없죠..? 

씁쓸하지만 한국의 현실입니다. 그 중 가장 이슈가 되는 것은 뭐라하더라도 폭락한 출산율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자살율입니다. 오늘은 이 안타까운 상황을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늘어나는 자살율 

2024.4월 정부에서 작년 대비 1월 사망자가 319명(32%)가 증가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전세계적으로도 자살율이 제일 높지는 않지만 OECD국가 기준으로 보면 압도적인 1등입니다. 

매년 13,000명이 죽고 이는 매일 35명, 매 시간 1.5명이라는 엄청난 수치입니다.

 

자살율이 높은 다른 나라를 보면 베네수엘라, 아프리카, 러시아 등 이유가 있어요..(내전, 전쟁)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런 것도 아닌데 이렇게 높은 것을 보면 사회적으로 병이 단단히 들어버린것 같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1990년 초만 하더라도 자살율이 높은 나라는 아니였습니다. 그런데 1990년 중반 부터 

2000년대를 들어서면서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자살율은 3배 상승했고 출산율은 절반이 감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10대에서 30대의 자살율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죠.

실제로 2007년 이후 청년의 사망원인 1위는 항상 자살입니다.

 

원인이 뭐야?

1. 결과 지향적인 사회

많은 전문가들이 생각하는 첫번째 이유로는 우리나라가 개인의 성공에 너무 많은 초점이 맞추어진 사회가 원인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그 개인의 성공의 지표가 오로지 돈이라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우리나라가 중시해오던 전통적인 유대감, 사람간의 정 이런 것들은 약해지고 서로를 이겨야만 하는 상극적인 사회가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1. 한국이라는 나라는 오징어 게임처럼 456억의 상금이라면 죽음도 불사한다.

2. 한국사람들은 본인의 나라를 '헬조선'으로 부르고 그처럼 이 나라는 죽음이나 이주를 통해서만 탈출이 가능하다.

3. 미국에서는 문화 아이콘들이 자살을 하면 자기성찰을 한다. 그러나 한국은 그렇지 않다. 

 

이 세가지는 한국에 대한 해외의 평가들인데 이걸보면 밖에서 봤을때도 한국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2. 터무니 없는 자살 예방 정책과 예산

실제 우리나라 자살 피해자의 90%가 진단 및 치료가 가능한 정신 상태에서 자살을 해버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러한 피해자들에 대한 정책도 부실하고 예산조차 투자하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에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자살 예방 예산은 451억 일본 67,033억 대비 0.7% 정도 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나왔습니다. 

자살 예방 예산 합계

오로지 성장에만 예산을 투자하고 있는 상황이고, 병들어 있는 사회 대비 그 안전망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인 것이죠.

 

3. 주변인의 무관심 

자살사망자 중 거의 대부분(94%)이 사망 전 경고신호를 내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변인들은 그 신호를 인식을 못하는 경우도 있고 알더라도 별 거 아니겠지? 라고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하면 내 아이가, 내 동생이, 내 친구가 그럴줄은 몰랐다 라며 후회하죠.

 

어떻게 막을꺼야??

사실 이러한 심각한 문제점을 정부에서 인식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살율을 줄이겠다는 나름의 계획은 발표했습니다. 

정신건강 검사 대상자를 확대한다느니, 위험군 관리를 한다느니, 나름 계획은 있지만 사실상 너무 추상적이고 무엇보다 

예산이 너무 적습니다!

 

 발전하는데 돈을 쓰는 것은 좋습니다만, 출산율도 감소한 마당에 이미 태어난 사람들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는데 돈을 좀 더 투자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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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떤것인가요?

돈 ? 사랑? 명예? 그 어떤것이 될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제 1순위 놓는 것은 아마 가족일 것입니다.

근데 오늘은 이 소중한 것을 자신의 손으로 지워버린 끔찍한 사건에 대해 알려드릴려고 해요.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존

존은 아내와 자식 3명(딸1, 아들2)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791년 9월 11일 존은 자신의 손으로 모든 가족을 끔찍하게 살해했습니다. 

 

우선 아내는 헬렌을 총으로 쏘고, 자신의 어머니 또한 짧게 입을 맞춘 후 뒤통수에 총을 쐈습니다. 

이 와중에 점심을 먹고 오후가 되어 돌아온 첫째 딸을 또 총을 쏴 죽인 후 13살인 막내 아들 또한 총을 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존은 즉결 처형과도 같은 스타일의 살인 방식을 택했죠. 존은 가족들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모르길 바랐거든요.

 

하지만 마지막 남은 둘째 아들 존 주니어는 눈치가 빨랐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은 상태에서 몸싸움을 벌이다 총알에 맞았고 즉사하지 않았죠.


결국 존은 둘째 아들 심장에 계속해서 총을 쐈습니다. 추후 부검 결과 둘째 아들은 몸에서 10발의 총자국이 발견되었죠.

그렇게 가족 모두를 살해한 조는 가족들의 시신을 저택에 큰 연회장에 눕혀 놓았습니다. 그리고 각 시신마다 쪽지를 남겨 자신이 왜 그들을 죽였는지 이유를 써놓았죠. 어머니의 시신은 너무 무거워서 연회장이 아닌 다락방에 그대로 남겨두었는데 이런 사소한 것까지도 적어두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존은 자신이 다니던 교회 목사에게 5페이지 분량의 편지를 남겼습니다.

 

편지에는 자신은 세상에서 너무 많은 악을 보았으며, 가족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그들을 죽였다고 설명해 놓았습니다. 

 

왜 이런 짓을 벌였을까?

1. 강압적인 어머니

존 에밀리스트는 1925년 9월 17일 미국 미시건주 베이시 독일계 미국인 부모 사이의 외동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존의 어머니는 매우 강압적이면서도 과잉보호가 심했습니다.

어머니가 허락해 주지 않으면 존은 집 근처를 벗어날 수 조차 없었죠.

그러다 보니 존은 자연스레 또래 친구들과 멀어지게 되었고, 친구 한 명 없이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2. 아내의 편집증

존의 아내는 알코올 중독과 매독이라는 성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매독이란 것이 주사 한 방에 낫는 병이지만 당시는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이것이 존에게서 옮은것이 아닌 첫째 남편에게 옮아 존과 결혼한 것이였죠. 그것도 몰래..

 

 병세가 깊어질수록 그녀는 술을 더 많이 마시기 시작했고,이 모든 것은 존의 아내를 신경질적인 편집증 환자로 만들었죠. 아내는 공개적으로 존의 성적 능력을 자신의 전 남편의 성적 능력과 비교하며 존에게  수치심을 주기도 했습니다.

 

3. 경제적 어려움

1971년 저지시티 은행이 폐쇄되면서 존은 갑작스레 직장을 잃게 됩니다. 뭐 직장을 잃게 되는 것이야 누구나 한 번쯤 겪을 만한 일이죠. 하지만 존 리스트는 벌려놓은 게 너무 많았습니다. 정기적인 급여가 사라지자 순식간에 생활비와 주택 유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재정난을 겪게 되죠. 구력감과 불안감에 휩싸인 존은 이 상황을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치 여전히 회사에 다니는 것처럼 옷을 차려 입고 출근 시간에 집을 나서죠.

 

낮 동안 주로 여러 회사에 면접을 보러 다니거나 보험 판매를 하거나 기차역에서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신문을 읽곤 했습니다. 하지만 재취업에 성공하지 못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집 재정 상태는 더욱 나빠져만 갔습니다.

 

4. 삐뚤어진 신앙심

존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루터 교에 신앙심이 깊었는데 어떤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자신이 기도하면 그 죄가 사해지고,

가족 또한 천국에서 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교도소에서도 자신이 천국에 갈 수 있기를 바란다는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사라진 살인자 존

 원인이야 그렇다 치고, 살인을 저지른 존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안타깝게도 이러한 극악범죄를 저지르고도 존은 20년동안 잘살았다고 합니다. 

 

편지에다 많은 증거를 남겼기에 존이 범죄자인 것은 확실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증거에도 마치 흔적도 없이 존은 사라졌을까요?? 

존은 살인 후 기차를 타고 뉴저지에서 미시간까지 그다음에는 콜로라도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1972년 초 덴버에 정착하여 자신의 대학 동창의 이름 로버트 피터바 크로 라는 가명을 사용해 새 삶을 시작하죠.

로버트가 된 존은 이전의 삶을 거의 완벽히 재건해 냈습니다. 1979년부터 1986년까지 덴버 외곽의 종이상자 제조업체 감 시간으로 일했고, 지역의 루터교 교회에 가입하였으며, 차량이 없는 교회 회원들을 위해 카프를 운영하기도 했죠. 또 종교 모임에서 들로레스 밀러라는 여성을 만나 1985년에 결혼도 했습니다. 체포 1년 전인 1988년 2월에는 아내와 함께 버지니아 주 의사였고, 계속 로버트 피터바 클라크로 살아가며 회계사 일 역시 제개했죠. 겉에서 보았을 때 누가 봐도 독실하고 성실한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어떤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고, 평판도 좋았죠.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경찰들은 여전히 20년 전 가족을 죽인 냉혈한 존 에밀리스트를 찾고 있었고, "America's Most Wanted" 통해 몽타주를 공개한 순간 이웃이 신고를 하면서 경찰에 잡혀간 것이죠.

훗날 존 리스트는 투티 투엔티라는 미국의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 생각을 밝혔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그들은 나를 용서했거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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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범인이 10살 소년으로 밝혀져 영국 전역에 CCTV를 도배하게 만든 충격적인 사건, 제임스 벌저 유괴 사건을 파헤쳐 보겠습니다.도대체 어떤 사건이었기에 한 나라의 안전 정책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을까요?

 

사라진 제임스 벌저

1993년 2월 12일 영국 리버풀에 거주하던 드니스 벌저는 두 살배기 아들 제임스를 데리고 근처 대형마트로 장을 보러 나갔습니다. 장보는 것에 집중하던 드니스는 아들을 놓쳤습니다. 드니스는 바로 마트 보호소로 찾아갔지만 보호소에서도 제임스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드니스는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되었고 cctv를 함께 확인했습니다.

cctv에 찍힌 제임스 벌져와 범인

그 속에서 제임스는 정체 모를 10대 소년2명과 마치 한 가족 형제처럼 다정하게 손을 잡고 마트를 나가고 있었습니다. 경찰은 이를 납치사건으로 판단하고 제임스를 데려간 소년들을 조사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경찰과 부모는 별일 없겠거니 생각했습니다. 10대 소년들이 범인이었기 때문이였죠.

 

발견된 제임스 하지만 상태는...

하지만 기대와 달리 제임스는 실종 이틀 뒤인 2월 14일 실종 장소에서 약 4km 떨어진 찻길에서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2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의 몸은 기차에 밟혀 두동강이 나 있었고, 구타와 골절상으로 만 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제임스의 사인은 외부 충격으로 인한 뇌손상이었죠. 이 말은 기차가 밝고 지나가기 전에 이미 제임스는 죽은 상태였다는 겁니다. 얼굴은 파란색 페인트를 뒤집어 쓴 상태였고, 수많은 구타의 흔적과 입과 항문에는 건전지 삽입된 상태였죠.

 

당시 경찰이 제임스의 시신을 찾았지만 차마 아이 엄마에게 보여주기 꺼려했을 정도였습니다. 범인들은 존 베네베스와 로버트 톰슨. 나이는 10살 서로 친구 사이였죠. 이 둘은 경찰에 잡혀 조사가 시작되었을 당시 어떤 물음에도 침묵을 일관했습니다. 도저히 10살의 범죄라곤 생각할 수 없었던 경찰들은 배후에 무조건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두 소년의 집이나 옷에서 제임스의 얼굴에 묻어 있던 페인트와 제임스의 혈흔이 발견되면서 점점 소년들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범행인 것이 드러났죠.

증거가 나오자 서서히 입을 열기 시작한 소년들의 진술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범행 동기는 그냥 누구 하나 납치해볼까라는 생각이었다고 말하면서 반성이나 사죄 가 책도 없이 당시 범행 경위를 이야기했습니다.

사건 당일 두 소년은 원래 다른 아이를 납치하려고 했었는데, 아이의 엄마가 손을 잡고 끌고 가는 바람에 다른 대상을 찾다가 눈에 들어온 게 제임스였다고도 진술했죠. 범인들은 제임스에게 다가가 친절하게 말을 걸고 마트 밖으로 데리고 나와 3km 정도를 돌아다니면서 제임스를 때리거나 발로 차는 짓을 반복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추후 조사에서 이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38명이나 있었는데 아무도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죠. 사실 목격자들의 입장도 이해가 되는 게 왜인지 제임스는 울지도 않고 두 소년을 따라 잘 다니고 있었거든요.

 

누가 괜찮냐고 물어보면 친동생이다, 병원으로 가는 길이다라고 대답했죠. 무엇보다 눈앞에 어린 소년들이 아이를 납치했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소년들은 제임스를 데리고 한참 돌아다닌 뒤 인적이 드문 수로 근처로 이동해 끔찍한 짓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소년들은 제임스의 머리를 잡고 땅에 내리치고는 주위에 있던 벽돌이나 쇠막대 때리기를 반복했죠. 그러다 무게가 10kg이나 되는 쇠막대기를 제임스 머리에 떨어뜨렸는데 이 충격으로 제임스의 두개골은 깨지고 뇌손상을 입으면서 사망하게 된 것입니다. 제임스가 사망하자 소년들은 시신을 기찻길로 옮겼습니다. 사고사로 위장하기 위해서였죠. 그렇게 소년들은 제임스를 선로에 둔 채 비디오 대여점에서 시간을 보냈고, 이틀 뒤 제임스는 몸이 두동강 난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된 것입니다.

 

악마들의 성장 과정

존 베너블스 대체 둘은 어떻게 자라고 어떤 상황이었길래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이런 잔인한 짓을 저지르게 된 걸까요?

범인들의 사진

대부분의 범죄자가 그렇듯 이 둘도 불우한 과정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존 베너블스 같은 경우 부모가 이혼을 해서 어머니와 주로 살았는데,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못 받아서 그런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받고자 벽에 머리를 반복적으로 찍는 이상행동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학습장애를 가진 형제가 있어 보호자 명분으로 같이 특수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거기서 싸움을 자주 했다고 하는데 하루는 같은 반 아이의 목을 줄자로 졸라 죽이려는 사건을 일으켜 강제 전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전학을 가며 공범인 로버트 톰슨을 만났는데 로버트의 가정환경은 더 난장판이었습니다. 로버트는 7남매의 막내였는데, 부모는 알코올 중독자에다 친부는 늘 아내와 아이들을 상대로 폭행을 일삼는 막장이었죠. 다른 형제들도 제일 어린 로버트를 때리고 상습적으로 괴롭혔으며 한때 아동 보호 시설에 들어가 있기도 했습니다. 뭐 안타깝기는 하지만 불우한 성장과정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상상도 못할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두 소녀는 성인 범죄자와 같은 방식으로 재판을 받았고, 결국 징역 8년이 선고되죠. 여러분도 생각하실 겁니다. 죄에 비해 형벌이 너무 가벼운 것 아니냐고 말이죠.

 

형량을 마친 악마들

영국 국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분노한 영국 국민은 서명운동과 시위를 벌이고, 결국 소년들의 형은 8년에서 10년으로 늘어났지만 이 역시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심지어 8년이 지난 2001년 두 소년은 조기 석방이 되면서 새 이름, 새 신분을 얻고 세상으로 나왔죠. 이 조치는 당시 영국에서 범죄자들에게 일상 생활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조치였지만, 영국 국민들은 이러한 결정에 분노했습니다. 각종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그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추측하며 퍼뜨리기 시작했지만 이는 말 그대로 추측일 뿐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실제로 그들의 신상이라고 퍼진 정보 중 잘못된 정보가 있어 무고한 사람이 괴롭힘과 위협을 받아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그들은 석방 후에 어떻게 살았을까요? 사실 로버트 톰슨은 어떻게 살았는지 정보가 거의 없거나 거짓입니다. 그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은 후 범죄나 미디어에 노출될 만한 일을 하지 않았거든요. 화가 나지만 그는 새로운 정체성 하에 안정적인 삶을 이어가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존 베너블스는 다릅니다. 그는 석방 후에도 여러 법적문제에 휘말렸으며 2010년에는 아동 포르노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고 징역형에 처해졌고 석방 후 또 비슷한 문제로 수감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에 대한 새로운 정체성은 공개되었죠.

 

한국에서도 청소년 범죄의 잔악성은 증가하고 연령은 줄어들고 있어 차마 남일 같지 않습니다. 게다가 영국과 비슷하게 촉법소년이니 뭐니 하면서 처벌은 적죠..

개인적으로 처벌은 범죄를 보고 판단해야 된다고 생각하며 이정도의 극악 범죄를 저지른 놈들은 두번째 기회도 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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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아동학대 사건 : 3세 마나토의 슬픈 이야기

 

2020년 8월 16일, 일본 후쿠오카에서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3세의 어린 아이, 마나토가 의식불명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왔습니다. 그의 몸은 멍과 화상 흔적으로 가득했고, 그의 작은 몸에서만 무려 245개의 상처가 발견되었습니다.

마나토는 아동학대로 인한 급성 경막하 출혈로 인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 전역에 충격을 주었으며, 아동학대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금 일깨워주었습니다.

 

사건 전개

마나토의 어머니 아유미는 18살에 임신하여 19살에 그를 출산했습니다. 싱글맘으로서, 그녀는 유흥업소에서 일하며 마나토를 홀로 키웠습니다. 그러던 중 데이팅 앱을 통해 건설 노동자와 만나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마나토를 자신의 아들처럼 대했지만, 결혼 후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이후 마나토의 삶은 끔찍한 학대의 연속이었습니다. 마나토의 아빠가 된 남자는 폭력을 일삼았고, 아유미도 이에 동참했습니다. 특히 남자는 담뱃불과 전기 충격기를 사용하여 마나토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이 사건은 아동학대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보여줍니다. 아동학대는 단순한 가정 내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관심을 가져야 할 중대한 문제입니다. 마나토의 사례를 통해 우리 사회가 아동을 보호하는 데 얼마나 소홀했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마나토의 사례는 아동학대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과 그들을 보호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이러한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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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카 라인

페루의 나스카 사막은 그 자체로 거대한 미술 갤러리입니다.

여기에는 수백개의 지상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을 나스카 라인이라고 합니다.나스카 라인은 1920년대 항공 조사 중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이 거대한 도형들은 동물, 식물, 기하학적 패턴 등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지상에서는 그 전체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합니다.

 

왜 그러진걸까?

이 지상화들은 기원전 500년부터 기원후 500년 사이 나스카 문화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정확한 제작 방법과 사용한 도구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이 그림들은 왜 그려진 것일까요??

 

1. 천문학 관측 도구

나스카 라인 중 일부는 태양, 달, 별들의 중요한 천문학적 위치와 일치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고대 나스카 사람들이 이 지상화들을 이용하여 천문학적 현상을 관측하고, 농사의 적절한 시기를 결정하는 데 사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2.종교적 의식

일부 연구자들은 나스카 라인이 종교적 의식에 사용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 지상화들은 특정 신이나 영적 존재에 대한 경배의 일환으로 사용됐을 수 있습니다.

러한 추측은 고대 문명들이 종종 천체, 자연, 그리고 신에 대한 숭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 했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3.권력의 상징

거대한 규모와 복잡성을 가진 나스카 라인은 상당한 노동력과 조직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는 고대 나스카 사회 내에서 특정 그룹이나 지도자가 지닌 권력과 영향력을 상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고대 문명에서 예술과 건축이 종종 권력의 표현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역사적 사례에 근거합니다.

 

유네스코로 지정된 나스카 라인

이 신비한 지상화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보존이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자연 요인과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이 지상화들은 지속적인 위협을 받고 있으며, 이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는 나스카 라인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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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8일, 말레이시아 항공의 MH370편이 쿠알라룸푸르를 출발해 베이징으로 향하던 중 실종되었습니다.

이 비행기에는 227명의 승객과 12명의 승무원이 탑승하고 있었죠.하지만, 이륙 후 몇 시간 만에 모든 연락이 끊겼습니다.

이 사건은 항공 역사상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MH370 실종 사건 발생

말레이시아 항공 370편은 보잉 777-200ER 기종으로,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베이징 서우두 국제공항으로 향하던 정기 여객편이었습니다. 이 비행기는 중국남방항공과의 코드셰어 항공편이기도 했습니다. 비행기는 현지 시각으로 오전 2시 40분경 사라졌고, 이때 승객 중 대다수는 중국인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확인된 위치는 푸꾸옥섬 남쪽으로 246k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비행기는 갑자기 통신이 두절되었고, 공식적으로 실종 선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연락 두절은 많은 이론과 추측을 낳았습니다. 일부에서는 테러리즘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이후 이 두 사람이 망명을 시도하는 이란인으로 밝혀져 테러 가능성은 낮아졌습니다.

 

 

국제적 노력: 미스터리를 풀기 위한 시도

MH370의 실종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미국, 호주, 일본을 포함한 26개국이 수색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이러한 국제적 노력은 항공기 실종 사건의 해결을 위한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수색 팀은 인도양이라는 광대한 지역에서 항공기의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MH370의 추락 지점을 예측하는 것은 수색 작업의 핵심이었습니다. 인공위성 데이터와 기타 기술적 분석을 통해 추락 지점을 추정했으며, 이는 수색 작업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행기의 정확한 위치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이론들과 추측: MH370 실종 사건의 다양한 가설들

1. 기장의 자살 비행

일부 전문가들은 기장이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이 이론은 기장이 고의로 비행기를 추락시켰을 가능성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지만 기장이 스트레스를 받은 정황도 없고 뒷받침할 증거역시 매우 부족합니다.

 

2. 테러리즘

탑승객 중 일부가 위조 여권을 용한 것으로 밝혀졌을 때 이러한 추측이 확산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수사 결과, 위조 여권 사용자들이 테러와 관련 없는 이유로 위조 여권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로 인해 테러 가능성은 크게 낮아졌습니다.

 

이외에도 납치, 외계인, 정부 조작 등 여러 가설이 있지만 모두 명확한 증거가 없어 신빙성이 많이 떨어집니다. 

 

2024년 현재, MH370의 실종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수년간의 광범위한 수색에도 불구하고, 비행기의 정확한 위치나 사건의 원인에 대한 명확한 답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은 항공 역사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아 있으며, 앞으로도 많은 추측과 연구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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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잠을 안자면 어떻게 될까요??

 

수면실험

1965년에 이루어진 수면 박탈에 관한 실험은 인간의 신체와 정신에 미치는 수면 부족의 영향을 탐구한 중요한 연구 중 하나입니다. 이 실험은 과학자들이 수면이 인간의 건강과 일상 생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해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연구진은 한 봉사자, 특히 랜디 가드너(Randy Gardner)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했습니다. 가드너는 264시간, 즉 약 11일 동안 깨어 있어야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의 신체적, 정신적 상태는 지속적으로 모니터링되었습니다.

실험 초기 단계에서 가드너는 비교적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가지 신체적 및 정신적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기분 변화, 집중력 저하, 기억력 감소, 말하기 능력의 저하와 같은 증상을 보였습니다. 또한, 시각 및 청각 환각, 단기 기억 상실, 인지 능력 저하 등이 나타났습니다.

 

1일차

상태: 초기에는 비교적 정상적.

증상: 특별한 신체적, 정신적 변화는 보고되지 않음.

 

2일차

상태: 약간의 피로감과 집중력 저하 시작.

증상: 반응 시간 증가, 기분 변화가 약간 나타남.

 

3일차

상태: 명백한 피로감과 기분 변동.

증상: 집중력과 반응 속도 저하, 기분 변화가 뚜렷해짐.

 

4일차

상태: 정신적, 신체적 피로감 심화.

증상: 짧은 기억 상실, 언어 능력 저하, 소극적인 태도.

 

5일차

상태: 심한 피로와 기분 변화.

증상: 환각 경험, 기억력 저하, 집중 어려움.

 

6일차

상태: 심각한 인지 기능 저하.

증상: 심한 환각, 기억력 상실, 말하기 어려움.

 

7일차

상태: 극도의 피로감.

증상: 깊은 기억 상실, 반응 시간 매우 느려짐, 혼란.

 

8일차

상태: 정신적 혼란 상태 지속.

증상: 환각 심화, 매우 불규칙한 기분 변화, 판단력 저하.

 

9일차

상태: 심각한 인지 및 정신적 문제.

증상: 정신적 혼란, 불안정한 감정, 환각과 망상.

 

10일차

상태: 극단적인 수면 부족의 영향.

증상: 강렬한 환각, 인지 기능 심각하게 저하.

 

11일차

상태: 실험 종료 직전, 최대 수면 박탈 상태.

증상: 거의 완전한 인지 기능 상실, 심각한 환각 및 혼란, 극심한 피로감.

 

 

이 실험 결과는 수면이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필수적임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수면 부족이 심화될수록 랜디의 증상은 더욱 심각해졌으며, 이는 장기적인 수면 부족이 건강에 미치는 위험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실험 이후 가드너는 비교적 빠르게 정상적인 수면 패턴으로 돌아갔으며, 장기적인 부정적인 영향은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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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만 먹었는데 술에 취한다면 어떨까요? 

2014년 미국에서 한 남성이 음주운전으로 체포됩니다.
하지만 그는 절대 음주운전을 하지않았다고 했지만 혈중 알코올 농도는 높게
측정되었기에 모두 거짓말이라 생각했죠. 

정말 억울하지만 그 후에도 이런일 종종 발생했고 심지어 2017년
술을 한방울도 마시지 않았음에도 만취한 상태로 넘어져 두개골 내 출혈이 발생하여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충격적이게도 혈중 알코올은 면허정지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검사를 해보니 그는 자동 양조 증후군이란 병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동양조증후군?

자동양조증후군(Auto-Brewery Syndrome, ABS)은 사람의 소화계 내에서 발효 과정을 통해 알코올이 생성되어, 술을 마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술에 취하는 증상을 나타내는 의학적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주로 장내 미생물 불균형으로 인해 발생하며, 효모균인 Saccharomyces cerevisiae와 같은 균이 관여합니다.

발생 원인과 메커니즘

자동양조증후군의 주된 원인은 과도한 효모균 증식입니다. 이 균은 장내에서 섭취한 탄수화물을 발효시켜 에탄올을 생산합니다. 보통, 이 과정은 항생제 복용 후 장내 미생물 균형이 깨졌을 때, 혹은 특정 소화 시스템의 질병으로 인해 발생합니다.

증상과 진단

자동양조증후군의 증상은 쉽게 간과될 수 있습니다. 증상에는 혈중 알코올 농도 상승, 취한 듯한 상태, 혼란, 어지러움 등이 포함됩니다. 진단은 복잡하며, 일반적으로 장내 효모균 검사, 혈중 알코올 농도 측정, 환자의 식습관 및 의료 이력 조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치료와 관리

치료는 주로 장내 미생물 균형을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항진균제, 저탄수화물 식단, 프로바이오틱스 복용 등이 일반적인 치료 방법입니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리와 개인 맞춤형 치료 계획이 필요합니다.

 

 

자동양조증후군은 사회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잘못된 음주운전 적발, 직장 내 문제 등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상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인식이 필요합니다.

 

자동양조증후군은 인체와 미생물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입니다. 이 상태는 의학적으로 희귀하긴 하지만, 그 존재가 우리에게 인체의 놀라운 능력과 잠재적인 질병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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