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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앙의 예고 - 하늘의 땅에서 발생하는 기현상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하늘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면 그것은 삿된 일의 징조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현상이 1670년 1월 1일 발생합니다. 바로 안쪽에는 붉은 빛을 띄고 바깥쪽은 푸른 빛을 띄는 해무리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해무리를 시작으로 하늘에서 각종 이상현상들이 나타났습니다. 

 어느 날  평안도에서는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으며 희천군에서도 햇무리가 지고 양이(해의 양쪽에 두 개의 고리가 생김) 가 있었고 그 모양은 흰 무지개 세 가닥이 가로로 얽힌 모양새였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또한 태백성(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 현종 11년 1월 6일 - 

 밤에 유성이 하고성(독수리자리) 위에 나왔는데 꼬리가 길고 색깔이 붉었다. - 현종 11년 1월 10일- 

등 이러한 유사한 일들이 1월 내내 발생하여 보고에 올라왔다고 합니다. 

 

땅에서는 자연재해가 계속 발생했습니다 .현종 11년 2월에 한양에는 눈과 우박이 쏟아졌는데 그 크기가 오리알만하여 4살된 아이가 우박에 맞아 즉사하는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또한 평안도에는 3월 말까지도 서리가 내려 심어둔 곡식의 싹이 죽고 나머지 식물들도 피해를 입었습니다. 4월부터는 엄청난 가뭄이 닥쳐 들판이 모두 타버리고 밀과 보리조차 수확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던 5월 갑자기 마른 하늘에 큰 비가 내립니다. 문제는 이 큰 비가 정말 그칠 줄 모르고 내렸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비로 전국 팔도에 홍수가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각종 산사태가 발발합니다. 

 

재앙의 시작

이런 자연재해들로 수확할 수 있던 식량은 없고 그동안 있었던 식량들도 모두 사라진 지 오래였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진휼소라는 곳을 마련하여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등 대책을 마련했지만 너무 오래되는 굶주림과 각종 전염병 등으로 약해진 백성들은 줄을 기다리는 중에도 죽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길거리에는 기아로 죽은 사람들이 넘쳐났으며 곡소리로 가득찼다고 합니다. 그러나 곧 곡소리는 사라지고 더 큰 지옥이 시작됩니다. 이미 기아로 죽은 사람들을 슬퍼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 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대기근 1년이 지난 시점부터 사람들은 서로를 잡아먹기 시작합니다. 그 기록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연산에 사는 사가의 여비 순례가 깊은 골짜기 속에서 그의 다섯 살된 딸과 세 살 된 아들을 죽여서 먹었는데 가서 사실 여부를 물으니 그들은 아들과 딸이 병 때문에 죽었는데 큰 병을 앓고 굶주리던 중에 삶아 먹었으나 죽여서 먹은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합니다. 죽은 이들을 먹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고 죽어가는 이를 먹는 것도 당연해지고 있었습니다. 조정도 이러한 사태에 대해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식인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벌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자신의 자식 또는 부모를 잡아먹는 이들이 너무 많아 '차라리 버리고 가는 것이 자비롭다' 라는 이야기까지 떠돌았습니다. 

 

이 기근은 2년만에 막을 내렸는데 2년동안 피해가 엄청났습니다. 당시 기록된 피해자만 봐도 1400만 인구 중 85만명이 기근으로 사망했는데 기록되지 않은 인구가 더 많았다고 볼 정도로 실제로 입은 피해는 더 컸습니다. 

 

대기근의 원인 

학자들은 재앙의 원인을 소빙하기가 원인이라는 봅니다.  실제로 당시 구의 온도가 전체적으로 1도 정도 낮아졌던 해인데 조선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수준의 역병과 기근이 돌았다고 합니다. 

 

 같은 시기에 인도에서는 대칸 대기근이 발생하고 여기서 사망한 인도인은 700만 정도로 집계됩니다. 또한 일본에서도 대기근이 발생하였고 유럽에서는 대 역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시기에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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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코벳의 어린 시절 

1875년 인도에서 태어난 짐 코벳은 어려서부터 사냥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습니다.

9살 때 부터 엽총으로 표범을 잡으며 열한 명의 형제 자매 중에서도 사냥 실력과 센스가 월등히 높았고 전문적인 사냥꾼들마저 어린 코벳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숲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연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키운 코벳은 학생의 나이에 접어든 이후 더 이상 무의미한 사냥은 하지 않고 여행을 다니며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18세에 학교를 그만둔 뒤 철도에 연료 검사관으로 일을 하다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군에서 그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보병 장교까지 진급하게 됩니다.

짐 코벳

공포의 식인 호랑이 참파와트의 등장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07년 인도 정부로 부터 코벳 앞으로 공문이 한 통 도착합니다. 

공문의 내용은 쿠마온 지역 인근에 출몰한 한 마리의 호랑이로 인해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고 정부 측이 사냥꾼을 물색하던 중 코벳에 대한 소문을 전해 듣고 그에게 도움을 요청이었습니다.

'참파와트 호랑이'라고 이름 붙은 이 맹수에게 희생당한 사람은 대부분 여성과 어린 아이들이었는데 그 수가 무려 436 명이었습니다. 정부는 한 마리의 호랑이를 잡기 위해 군대까지 동원하였지만 참파와트는 이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추적을 피해가며 마을 주민들을 끊임없이 습격했습니다.

이후 정부는 최고의 정예 부대라고 불리는 구르카 용병단까지 파견했지만 이 마저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또한 동네 사람들이 지역의 모든 호랑이와 짐승들을 죽이고 정작 문제의 식인 호랑이는 잡지 못한체 피해가 계속 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참파와트 호랑이

원래 다시는 동물을 사냥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한 그였지만 이 호랑이 때문에 사람과 동물 모두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직접 호랑이를 사냥하기로 결심합니다. 

 

사냥 시작

코벳은 사냥을 시작하기 전 정부에게 한 가지 사항을 요청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부가 이 호랑이에게 걸린 어마어마한 현상금들을 모두 취소시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막대한 현상금은 어리숙한 사냥꾼들을 불러들였기 때문에 되려 호랑이에게 사냥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추적을 하는데 있어서도 방해 요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정부는 곧바로 요청을 수락하였습니다.

조사를 시작한 코벳은 발자국과 특징들로 해당 맹수가 8피트 정도(2m 40cm 정도) 크기의 뱅골 호랑이라는 것과 암컷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큰 크기가 아닌 이 호랑이는 피지컬이 아닌 지능적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사냥했다는 뜻이었고 전설의 사냥꾼인 코벳 역시 추적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흔적의 실마리가 보일 것 같으면 사라져 버리고 닿을 것 같다가도 어느새 멀어져 버렸습니다. 이유를 고심하던 코벳은 참파와트가 쇠 냄새에 유독 민감하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참파와트는 쇠 냄새를 맡기만 하면 해당 산에서 아예 자취를 감추고 다른 곳에 다시 나타나 주민들을 습격하는 행태를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참파와트의 약점과 묘수

코벳은 참파와트의 이 사냥 습성을 이용한 하나의 묘수를 떠올립니다.

마을 사람들을 대거 동원하여 농기구를 들고 산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와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럼 쇠 냄새를 맡은 호랑이는 그것을 피해 산 아래로 내려올 것이고 이때 코벳이 호랑이를 저격하는 작전이었습니다.

작전은 실행되었고 코벳의 예상대로 아직 인근 산에 머물고 있던 참파 아트는 산 아래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코벳은 덤불 속에서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산을 내려온 참파와트는 그대로 코벳의 총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이것이 코벳의 첫 식인 맹수 사냥이었습니다.

 

이는 짐 코벳의 수많은 사냥 중 제일 유명한 일화이며 사람을 가장 많이 잡아먹은 동물 1위로 기네스에 랭크되어 있기도 합니다

 

참파와트를 뛰어넘는 숙적과의 조우 

가장 유명한 스토리는 참파와트 호랑이 이지만 코벳이 진정으로 숙적으로 느꼈던 맹수는 달랐습니다. 

바로 수컷 뱅골 호랑이였던 독신자였습니다. 독신자의 별명은 그가 10년동안 짝이 없이 사람들을 사냥해서 그런 별명이 지어졌는데 인도의 우타르프라데시 주에서 1920년 1930년까지 1년 동안 활동하며 200 이상의 사람을 포식하였습니다.

이에 정부는 독신자가 주로 활동하던 일대의 숲을 모조리 벌목해 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터전을 잃은 호랑이는 살던 곳을 떠나 새 보금자리에 정착하였는데 그곳은 다름 아닌 짐 코벳이 살던 집 근처의 숲이었습니다. 

 

1930년 겨울 산책을 하던 코벳은 이제껏 자신이 본 어떠한 호랑이보다 큰 호랑이 발자국을 발견합니다. 

발자국으로 추측되는 호랑이의 크기는 무려 3미터가 넘었습니다. 코벳은 곧바로 총을 꺼내들고 경계태세를 취했으나 근거리에서 거대한 호랑이를 마주치기에는 부담이 있어 서둘러 집으로 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코벳은 집 근처 호수로 나가 흡연을 하던 중 독신자와 처음 마주치게 됩니다.

 이를 두고 코벳은 "호랑이는 덤불 속에서 느리게 걸어 나오더니 나에게 두 눈을 고정시킨 채 호수에서 목을 축이고 돌아갔다. 그것은 내가 살면서 본 어떠한 광경보다도 공정하고 아름다웠다. " 라고 합니다.

 

 참파와트 호랑이가 늙고 병든 영악한 호랑이였다면 파월과 호랑이는 지능과 더불어 크기마저 거대한 말 그대로 괴수였습니다. 코벳은 이 악명높은 호랑이를 꼭 잡을 것을 다시 다짐하고는 호랑이를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독신자 사냥 

추적 중 코벳은 독신자의 울음소리로 추측되는 포효를 듣게 됩니다. 그는 소리에 민감한 호랑이를 유인하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가 호랑이 울음소리를 흉내내 유인에 성공하게 되는데 코벳의 계산에는 그가 30초쯤 후에 도착할 것이라 예상 자세를 잡은 뒤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독신자는 코벳이 숫자를 8까지 세웠을 때 이미 10미터 앞의 덤불까지 접근하여 거대한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코벳은 숨을 죽이고 천천히 총구를 돌려 독신자의 머리를 겨냥했습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 독신자의 위험에 기가 눌려버린 코벳은 명포수답지 않은 실수를 해버렸고 조준하던 머리의 정 중앙이 아닌 오른쪽 눈 아래를 맞춥니다.

그리고 총이 맞은 독신자는 숲이 떠나가라 포요하며 공중으로 펄쩍 뛰어오르더니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주위 10m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나무를 찢어버리는 독신자의 분노에 완전히 공포에 질려버린 코벳은 그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가만히 엎드린 상태로 독신자가 난동을 멈출 때까지 30분을 숨죽인 채 공포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총을 장전하는 소리마저 낼 수 없어 한 자세로 가만히 들고 있느라 팔에 경련까지 일어났습니다.

독신자가 몸부림을 멈추자 코벳은 엎드린 상태로 천천히 뒤로 빠졌고 거리를 충분히 벌린 뒤에 일어나 집까지 전속력으로 달렸습니다. 독신자가 코벳을 추격하지 않은 덕에 그는 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준비를 마친 후 다시 숲으로 향했습니다.

 코벳은 큰 상처를 입은 독신자가 멀리 이동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하였고 근처 개울에 잠복합니다. 사냥을 할 여력이 되지 않으면 목이라도 추기러 올 것이라고 추측한 것인데 얼마가지 않아 호랑이 한마리가 피를 흘리며 다가왔습니다.

코벳이 독신자를 발견했을 때 거대한 수컷 호랑이는 이미 뛰어들 자세를 취하고 코벳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코벳은 저번처럼 자칫 망설이기라도 하면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고 10년 넘게 지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파월가의 독신자는 그렇게 최후를 맞이합니다. 

파월가의 독신자를 사냥 성공한 코벳

 

전설의 마침표

 이 후로도 식인 맹수 사냥을 이어가던 코벳은 동물들의 살 곳이나 먹을거리 등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러한 사태가 끊임없이 발생할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인도 정부 측에 요청하여 야생 동물들이 터전으로 삼을 수 있는 국립공원 건립을 제안하였습니다.

당시에는 동물 보호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잡기 전이었으며 야생동물 보호를 위한 국립공원은 생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식인 맹수들을 사냥하며 국민적인 영웅으로 추앙받던 그의 인도 정부 측도 코벳의 요청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수락하여 공원은 그의 이름을 따 코벳 공원이 되었습니다. 

 

 짐 코벳은 63세 때 사냥한 식인 호랑이를 마지막으로 일생을 바친 포수직을 은퇴합니다.

그 후 케냐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자신의 여섯 번째 자서전 지필을 마치고 1955년 4월 19일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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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터 섬

 

이스터 섬은 화산 폭발로 인해 생겨난 화산섬인데 서울 면적의 4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육지랑은 워낙 떨어져 있어 세상의 끝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초기에 이 섬에는 거대한 야자수 나무 약 1억 그루가 섬 전체를 뒤덮고 있었고 화산 폭발 덕분에 토양이 비옥하기까지 해서 나무와 곡식들이 자라기에 너무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이렇게 비옥한 땅에 약 50명의 폴리네시아인이 인류 최초로 발견하게 됩니다.

원주민들이 처음 정착했을 때의 섬은 숲이 울창하고 식생이 풍부했으며 이러한 자연을 가지고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왔습니다. 이들은 섬의 평화를 기리기 위해 모아이를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인구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부족한 경쟁이 심화되면서 지배층들은 가장 눈에 잘 띄는 모아이 석상으로 그들의 힘을 과시하였습니다.

 

실제로 초기 석상 크기는 4m에 불과했지만 이것을 점점 크게 제작하면서 무려 20m 높이에 무게 90ton에 달하는 큰 모아이를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석상의 수는 수백 개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작은 섬은 모아이로 가득해져 갔습니다.

 

모아이 석상에 대한 궁금증

 

하지만 어마어마한 석상을 고도의 발전된 기술이 없던 원주민들이 해안으로까지 직접 옮겼다는 것인데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 거대한 석상을 만들고 옮겼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두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우선 첫번째 가설은 나무를 잘라 썰매처럼 끌었다는 것입니다. 

 

나무를 레일처럼 깔아 거대한 석상을 높인 후 이것을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의 땅이 평평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십 톤에 달하는 석상을 올려놓으면 나무의 지지력이 약해 뚝 부러지는 일이 허다했을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두 번째 가설은 밧줄을 묶어 이동시키는 방법입니다.

 

가설을 증명하는 연구원들

이는 석상을 밧줄로 묶은 뒤 양쪽에서 교대로 잡아당기면 모아이 석상이 마치 앞으로 걷는 듯이 옮겼다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원주민의 옛날 이야기에 따르면 모아이는 마술처럼 마치 살아서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스터 섬의 언어 중에는 다리 없이 뒤뚱뒤뚱 걷는 것을 의미하는 '네케네케'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실제로 이 이야기를 들은 한 연구팀은 약 5톤 짜리의 모아이 복제품을 만들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실험을 하였는데 40분 동안 약 100m를 옮기는 데 성공합니다. 이로써 연구팀은 주민들이 석상 하나를 1km로 옮기는 데 단 하루면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심지어 부서지고 버려진 석상들이 대부분 비탈진 도로 구간에서 발견이 되었고 내리막길에서 발견된 석상들은 마치 걷다가 넘어진 것처럼 얼굴이 땅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스터 섬의 멸망

이스터 섬은 초기에는 울창한 섬으로 둘러쌓여 있었지만 지금은 황량한 땅과 석상만 놓여있습니다. 

 

  50명으로 시작된 인구는 최대 17,000 명까지 증가하여 인구가 포화 상태가 되자 식량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농경지를 추가로 개간하고 더 많은 배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나무가 사용되었고 점점 자원이 고갈되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스터 섬이 황폐해진 이유는 인간의 벌채만이 아니라 사람이 정착할 때 같이 유입된 폴레네시아 쌀쥐에 의한 것이 크다고 합니다. 

 쥐를 들여온 이유는 원주민들이 쥐를 식용으로 길렀기 때문인데 천적이 없는 잡식성 쥐가 땅에 떨어진 모든 씨앗을 먹어치우면서 점점 나무가 싹을 틔우지 못하는 환경으로 변해갔습니다.

 

비극의 시작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섬에 울창했던 숲과 가축 등 많은 것이 사라져버렸고 나무가 없어 배와 사냥 도구를 만들지 못해 그들의 주식이 물고기를 얻을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배고픔에 굶주린 사람들은 남아 있는 가장 커다란 고깃 덩어리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스터 섬의 쓰레기 더미에서는 사람의 뼈가 흔하게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를 방증하듯 이스터섬의 언어에는 식인에 관련된 관용 어구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상대방에게 "아침에 먹은 너의 엄마 살이 이빨에 끼었다" 라는 욕을 했을 정도라 합니다.

 

 굶주림에 지친 섬 사람들은 내부 반란과 부족한 전쟁이 일어났고 기근 식인 전쟁의 반복 속에서 17,000 명의 인구는 반 이상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이상 모아이를 숭배하지 않았고 석상을 짓지도 않았습니다.

자연 환경이 극도로 파괴되어 변변한 배 한 척도 만들 수 없게 되자 이스터 섬을 탈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늘을 나는 새 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새를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조인 마케마케"라는 새 머리를 가진 신을 믿기도 하였습니다.

 

또 다른 재앙

 1722년 유럽인 야코프 로헤베는 태평양에서 발견한 이스터 섬을 발견한 것을 시작으로 1774년 영국의 타원과 제임스 쿡이 차례로 발견하게 되고 수많은 유럽인들이 이스터 섬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이때 유럽에서는 천연두와 매독이 전 유럽을 강타하며 대유행으로 번지게 되는데 비슷한 시기에 유럽인들이 이 섬에 발을 들이는 바람에 원주민들에게 전염시키게 됩니다. 

 면역이 전혀 없었던 많은 원주민들이 이로 인해 사망하게 됩니다.

 

또한 라틴아메리카에서 온 노예 무역상들이 많은 원주민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끌고 갔고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대륙 사람들에 의해 발견된 이스터섬은 폭풍이 몰아쳤고 1877년 섬에 남아 있는 원주민 수는 고작 111명 유럽인들에겐 미지의 땅이자 폴리네시아인들에겐 풍요의 섬이었던 이곳은 이제 죽음의 섬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스터 섬의 근황

죽음이 섬이 되어 많은 원주민이 없어진 이스터 섬을 칠레가 돈벌이를 위해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섬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스터 섬의 모아이가 크게 유명해지면서 그 유명세로 관광업이 흥하자 칠레 이주민들이 이곳에 와서 사업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칠레 이주민들이 세운 가게에서 파는 농산물은 이스터 섬에서 기른 것이 아닌 수입한 것이며 모아이 기념품 또한 원주민이 만든 것이 닌 칠레 이주민들이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기존에 살던 원주민들은 칠레 이주민들에게 밀려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현재 원주민들은 칠레 이주민들과 경제적 격차와 차별적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으며 국제사회의 독립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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