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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병의 첫 발생 

1518년 중세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라는 마을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프라오 트로피아라는 여성이 거리를 활보하며 춤을 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하나 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점점 불어난 무리는 한 달이 지날 무렵 400명이 넘는 집단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집단으로 기이한 춤을 추는 유럽사람들

춤을 추는 이들은 무아지경에 빠져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으며 발에서 피가 나고  갈비뼈가 부러져도 춤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간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춤을 춰 심장 발작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까지 발생했습니다. 이들이 모여서 춤을 추는 현장은 즐거운 축제 현장이 아닌 피비린내와 비명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춤을 추는 이들 중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길거리에는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사람, 환각 상태에 빠져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탈진하여 쓰러진 사람은 운이 좋은 축에 속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무도병이라 불리는 이 춤추는 질병은 프랑스를 넘어서 유럽 전역으로 번졌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스위스에도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여러 기록들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무도병은 이곳저곳에서 간헐적으로 터지며 무려 200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무도병의 원인

무도병의 원인으로는 굉장히 많은 가설들이 존재합니다.

1. 미신

당시 유럽은 무도병뿐 아니라 다른 전염병에도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흑사병부터 나병, 천연두까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전염병을 떨치는 의미를 담아 일종의 미신 행위로 춤을 춘 것이라는 가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염병을 피하기 위해 탈진할 때까지 춤을 추다가 사망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아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2. 저주

중세의 유럽은 과학보다는 수술 혹은 저주의 힘을 믿는 경향이 더 컸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병이나 현상에 대해서는 흑마술이 뒷배경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고 사람들이 미친 듯이 춤을 추며 죽어가던 것 역시 일종의 저주가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

마녀로 재판받아 억울하게 죽는 사람들

당연히 이것은 사실이 아니고 소문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이것이 진실로 여겨졌고 이로 인해 마녀로 억울하게 재판장으로 끌려가 죽은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았다고 합니다. 

 

3. 맥각균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의 전염병을 기록한 책이 있습니다. '질병의 역사'란 책을 발간한 프레드릭 카트라이트와 마이클 비디스는 중세 무도병의 원인이 맥각균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였습니다.

맥각균은 습한 날씨에 호밀에서 자라나는 균류의 일종인데 맥각균을 섭취할 씨 식중독과 유사한 복통과 구토 증세를 보이며 심하면 발작까지 올 수 있다고 합니다. 당시 서민들이 주로 먹던 주식 역시 이 호밀이였는데 여기서 매각균에 감염되었다는 것입니다.

맥각균(Claviceps purpurea)

 하지만 이 역시 하나의 주장에 그쳤습니다. 왜냐하면 맥각균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염되지는 않았는데 당시 무도병의 전염속도로 보아서는 음식을 먹어야 걸리는 식중독으로 인한 발병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위의 3가지 가설은 현상에 대한 근거로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정설로는 그저 유럽에서 퍼진 집단 히스테리 정도로 보고 있지만 과연 이 무도병에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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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히말라야의 국립공원 하리키잔 마도아른 산맥 중턱에 있는 루프 쿤드 호수에서 수백 구에 해당되는 사람 해골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호수는 수심이 최대 3m 정도로 아주 얕은 호수인데 도대체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죽은 걸까요?

가설 1. 전쟁 중 죽은 일본군의 시체

 

발견 시점이 제 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는 점을 근거로 해당 시체는 일본군의 시체가 아니냐는 추측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영국 영이었던 인도로 들어가기 위해 히말라야 산맥을 넘다가 추운 날씨에 고립당했고 물자와 식량이 보급되지 않은 상황에 단체로 아사한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군수 물자의 흐름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아 신빙성은 없는 추측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가설 2. 자연재해로 인한 대규모 사망 사건발생

 

유해를 조사하던 법의학자들은 해당 유골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찾아냈는데 바로 무언가에 의해 강하게 충격을 받은 것 같은 흔적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이것이 자연 재해에 의한 상처로 봤고 당시 그곳에 있던 수백명의 사람들이 이례적으로 커다랗고 많은 수의 우박을 맞아 죽은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여신의 저주

 

이것을 들은 마을사람들은 여신의 저주라고 평했습니다.

사건이 있었던 곳의 이름은 난다데비 봉우리였는데 이는 축복과 풍요를 기원하는 인도의 여신 난다데비의 이름으로 부터 지어진 명칭이었습니다.

옛부터 이 지역에서는 난다데비 여신과 관련하여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오래 전 우타라칸드 지역 인근을 다스리던 왕은 왕비의 임신 소식에 순산과 행복을 기원하기 위한 순례길에 오르게 됩니다.

이 때 고승은 왕에게 몇가지 당부사항을 전달했습니다.

1. 산은 여신의 영역이기에 신발을 벗은 채 맨발로 올라가야 된다

2. 이는 신성한 곳이기에 폭력과 향락을 취하면 안된다.

폭력과 향락은 군사와 여인을 의미하기도 했기에 혼자가라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왕은 이 조언을 무시하고 군사와 여인들을 데리고 산을 올랐습니다.

여신은 이에 분노하여 루프 쿤드 호수를 지나던 왕의 무리에게 큰 우박을 떨어뜨려 전부 몰살시켰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에 학자들도 이 수많은 해골들은 순례자들이 우박을 맞아 변을 당한 것 까지는 동의했습니다. 왜냐하면 5천 미터 고도의 산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번에 오를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 이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인근의 라타 마을 사람들은 12년에 한번씩 난다데비 여신을 기리는 축제를 연다고 합니다.

 

가설들을 깨는 증거가 나타나다.

 

이 가설들의 전제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발견과 사건에는 큰 연대 차이가 없다. 두번째는 해골들의 주인 즉 피해자들은 같은 시기에 사망했다. 그러나 하지만 최근 과학의 발전으로 이 해골들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었는데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일부 해골들은 7세기에서 10세기 사이 또 다른 해골들은 17세기에서 20세기 사이로 1,000년 이상의 시간차가 존재하는 유골들 이었습니다. 심지어 인종도 달랐습니다.

7세기에서 10세기 사이의 유골은 남아시아인으로 밝혀졌고 나머지는 그리스인으로 밝혀졌습니다.

이것은 기존에 했던 가설들을 모조리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자들은 1,000년 이상의 간격에 되는 해골들이 동시에 발견된 것도 신기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이 지역을 갔다는 근거를 역사적으로 찾기 힘들었습니다.

도대체 호수에서는 무슨일이 있었기에 이 많은 사람들은 1,000년간의 간극을 두고 호수에서 왜 죽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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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Symphony)은 관현악으로 연주되는 다악장형식의 악곡입니다. 여러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기악곡인데 그 중 규모가 가장 큽니다.

그래서 아무리 뛰어난 작곡가라고 해도 교향곡을 작곡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교향곡에 관해서는 대중을 자극하는 징크스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9번째 교향곡을 만들면 그 작곡가는 어떤 이유로든 사망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보고 음악가 아놀드 쇤베르크는 이런말 까지 남겼습니다.

" 9번 교향곡을 작곡한다는 것은 곧 죽음과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저주에 걸린 작곡가들

 

1. 베토벤

저주는 베토벤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은 20대 초반에 구상하여 30년이 지난 1822년 완성되었습니다. 다른 베토벤의 곡처럼 이 곡 또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 다음곡인 10번 교향곡을 준비하던 중 베토벤은 갑자기 사망하였습니다.

사인은 폐수종이라고 설이 있고 음주에 따른 간경화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2. 브루크너

최고의 교회음악가로 평가되는 브루크너는 30살의 늦은 나이에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순이 넘는 나이에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명성을 얻게 해준 곡은 7번,8번 교향곡이었습니다.

대중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9번 교향곡을 작곡하던 중 돌연사망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확인된 사실인데 그가 어릴 때 작곡한 곡 하나가 늦게 발견되어 실제로는 10번 교향곡을 작곡하다 사망한 것입니다.

즉 베토벤과 같이 9번 교향곡을 완성 후 10번 교향곡 제작 중 사망한 것입니다.

 

3. 슈베르트

슈베르트는 장르를 가리지 않았는데 오페라, 실내악, 피아노곡, 가곡 등 모든 분야를 통합하여 998곡이라는 많은 곡을 만들었습니다.

슈베르트는 8번 교향곡<미완성>을 작곡하던 중 완성하지 못한채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9번 교향곡인 <그레이트>가 세상에 드러나 그 역시 9번 교향곡의 저주를 피해가지 못한게 알려졌습니다.

 

4. 드보르작

체코의 음악가로 민족적인 작품으로 인기가 많은 그는 <신세계 교향곡>이라는 제목인 9번 교향곡을 발표하고 얼마 뒤 신장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저주를 피하고 싶어서..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유명한 구스타프 밀러는 이 저주를 피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여러 편의 교향곡을 작곡해 인기가 많았던 그는 9번째 교향곡을 제작할 시기가 다가옵니다.

그런데 다른 교향곡과는 다르게 9라는 숫자를 없애고 <대지의 노래> 라고만 표현한 노래를 발표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완성된 이후에도 그의 건강에는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열번째 교향곡에서 제 9번이라는 이름을 붙혀 발표하게 됩니다. 이 곡이 발표된 후 1년 뒤 그는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저주를 피했다고 방심했던 그는 그만 9라는 숫자를 써버려서 다시 저주에 걸린 것이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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