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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발생

2005년 4월 25일 오전 9시 18분경 일본 효고현에 위치한 스카구치역에서 일본 역사상 최악의 열차 탈선 사고가 발생합니다. 이 사고로 승객과 승무원을 포함하여 107명이 숨졌고 562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총 7량의 크기로 이루어진 열차는 스카구치역을 지나 다음 역인 아마가사키역을 1 4km 앞둔 300m 간의 커브 구간에서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궤도를 이탈해 버립니다.

 

 궤도를 이탈한 열차는 "이퓨전 아마가사키" 라는 아파트를 들이 받았습니다. 맨 앞 선두 차량은 건물 1층 주차장으로 들어가 주차된 차량들을 뭉개버렸고, 두번째 차량(2호차량)은 건물에 부딪혀 뭉개졌습니다. 그로인해 이 두 칸의 차량에서만 9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발생 원인

 

1. 당시 지하철 업계의 상황

2,000년대 초반 당시 일본의 철도회사들은 수많은 노선이 있는 지하철 업계에서는 서로 더 많은 승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경쟁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의 경우 대부분의 철도가 한국철도공사에 의해 운영되지만 일본은 과거부터 철도가 민영화되어 있어 여러 개의 철도 회사가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역에도 여러 철도회사의 노선이 배치돼 있기도 하며 이러한 일본 철도의 특성상 당연히 더 많은 승객을 유치하기 위해 철도회사들은 과도한 경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같은 노선에 배치된 여러 회사의 철도 차량

심지어 당시에는 일반 열차의 고속화 서비스가 유행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철도 회사들은 열차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계속해서 연구하고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그렇게 대부분의 회사가 열차의 속도를 향상시키면서 운행 배차 간격을 더 좁히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일본의 철도회사 JR 그룹 또한 업계 최고의 서비스와 속도를 자랑하고 있었는데요. JR 서일본도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운행 시간을 더 촘촘하게 배치하기 시작합니다.

 

2. 초보 기관사의 실전 운행과 철도 회사의 악습

JR 서일본의 다카미 류즈로는 당시 23세의 남성으로 열차 운행 경력이 11개월밖에 되지 않는 초보 기관사였습니다.

다카미 류즈로는 경험은 적었지만 열차를 운행하는 데 있어서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실전 운행을 배치 받았습니다.

 또한 JR 서일보는 만약 기관사가 운전 미숙으로 인해 열차를 지연시킬 경우 일근 교육이라는 자체 징계 교육을 부과하고 있었습니다.

운행이 미숙하면 다시 재교육과 숙달 과정을 거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엉뚱하게 이 모든 것을 기관사의 정신력 문제라고 치부해 버리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선로에 떨어진 비둘기 똥 닦아내기, 반성문 쓰기, 갈굼과 다를 바 없는 상사 면담 등을 실시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막중한 부담감과 실패하면 정신 교육이라는 막대한 스트레스를 껴안고 신참 기관사인 다카미는 2005년 4월 25일 열차운행을 시작합니다. 

 

사고 당일 오전 9시 15분경 대부분의 역에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볐고 다카미는 기와니시이케다 역을 지나 이타미 역을 향해 운행하고 있었습니다.

.

그리고 이타미역에 도착할 때쯤 브레이크를 걸어 급정차를 하게 되는데 이때 속도가 너무 빨라 열차는 원래 정차 위치를 70m나 지나쳐버리는 오버런 실수를 합니다.

이 열차는 정해진 위치보다 너무 멀리서 멈춘 탓에 열차를 후진해야 했는데 JR서일본의 규정상 열차가 오버런을 할 경우 기관사는 차장에게 보고를 올린 후 열차를 후진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작은 오버런이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지만 70미터나 오버런이 될 경우 징계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다카미는 무시무시한 일근 교육을 피하기 위해 차장에게 오버런의 규모를 줄여서 보고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한 승객이 열차 지연에 대해 항의를 하자 차장은 다카미의 부탁에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급하게 전화를 끊게 됩니다. 70m의 오버론과 보고 과정으로 인해 열차는 예정된 시각보다 1분 20초 정도가 지연되었습니다.

그리고 초조해진 다카미는 이 지연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서둘러 이타매역을 출발했습니다.

 

 오전 9시 18분 속도가 너무 빨라 열차는 몹시 거칠게 흔들렸고 불과 몇 초 뒤 다카미가 이끄는 전차는 급 커브길을 마주치게 됩니다. 그리고 속도를 주체하지 못한 열차는 커브길을 탈선하게 되었습니다. 

 

 

사고 이후 

사고 이후 해당 노선은 55일간 열차 운행이 중단 되었고 당시 JR 서일본 2대 회장인 츠노다 다츠오는 이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습니다.  또한 해당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을 빡빡한 열차 시각표로 지목되어 이를 개정하여 운행 소요시간이 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고 구간의 제한 속도를 70km/h 에서 60km/h로 수정하여 좀 더 안전한 운행을 하도록 조치했습니다 .

 

하지만 이러한 사건이 있었음에도 JR 서일본의 직원 대접과 소홀한 차량관리 때문에 언제 비슷한 사고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는 블랙기업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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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발생

1985년 8월 12일 도쿄에서 오사카로 향하는 일본 항공 123편이 524명의 승객을 태우고 이륙했습니다.

하지만 이륙 후 1시간 만에 비행기는 추락하여 탑승 인원 524명 중 520명이 사망하고 4명이 생존합니다. 

사망자 중 한국인은 6명이었으며 단일 항공기 사고로는 최악의 사고입니다. 

더욱 더 안타까운 점은 사망자 중 대부분은 추락 이 후 정부의 늦은 대응 때문에 사망했다는 점입니다. 

 

추락 당시 비가 내리고 있어 추락한 기체가 2차 폭발을 일으키지 않았고,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이 추락 현장에 생존해 있었습니다. 당시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잔해 속에서 죽어가던 희생자들의 비명 소리가 밤새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항공기 추락 현장

하지만 구조 활동이 시작되는 다음날 9시가 되기 전 승객 상당수는 추운 밤을 견디지 못하고 저체온증으로 숨지게 된 것입니다.

 

당시 상황

이륙하고 항공기가  7,300m에 도달하였을 때 기내에서 엄청난 폭발 소리가 들립니다.

기장은 긴급 상황임을 직감하고 긴급 사태를 의미하는 스쿽 7700 발신을 시작합니다.

 

폭발 후 항공기는 완전환 조종 불능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폭발 직후 비행기가 상하로 요동치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기장은 긴급 강화를 시도하면서 회항을 요청하였습니다.

 

비행기는 좌우로 매우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기압이 낮아지자 객실에서는 자동으로 산소 마스크가 승객 좌석에 내려왔습니다. 사무장은 산소 마스크와 벨트를 착용하라는 방송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상황

이 사진은 사고 당시 한 승객이 산소 마스크가 내려온 모습을 찍은 사진인데 일본 항공 123편의 마지막 기내 모습입니다. 이 상황에서 약 17분간 상공 6,000m에서 비행을 계속하였고 이후 오른쪽으로 급선회하면서 단번에 상공 4600미터까지 하강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체는 군마현 산악지대로 향하기 시작합니다.

 

조종사들은 더 이상의 방향 조절이 불가능해지자 급기야 날개에 달린 플랙과 엔진의 출력을 조절하여 방향 전환을 시도합니다. 이 때 기장은 추락하기 직전의 상태인 스톨에 걸릴 것을 주의하라고 합니다.

산악 지역에 들어온 항공기는 더 이상 고도가 상승되지 않았고 산에 부딪힐 듯이 고도가 낮아졌습니다. 123편은 계속해서 하강하였고 급기야 대지 접근 경보 장치가 작동했습니다.

경보 장치가 울리고 9초 뒤 오른쪽 주 날개가 수목과 부딪힙니다. 속도는 시속 640km에 도달했고 수목과 접촉한 3초 뒤 비행기는 그대로 산에 충돌하고 맙니다. 기장의 마지막 말은 이젠 끝이야라는 절박한 고음 소리였습니다

 

 

사고의 원인 

 추락한 항공기는 7년 전에도 한 번 사고를 일으켰는데 오사카 공항에 착륙 도중 기수를 너무 드는 바람에 테일 스트라이크 즉 꼬리 날개가 바닥에 부딪혀 후미에 손상을 입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고 후 보강판 수리가 부실하게 이루어졌으며 느슨했던 나사는 계속된 비행에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빠져나가 버린 것이었습니다. 

사건 당시 항공기 확대사진

위의 사진의 검은색 실선은 원래 있어야 하는 꼬리날개의 형상을 그린 것입니다.

이걸 보면 알 수 있듯 수직 꼬리 날개 전체가 없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비행기의 방향을 조절하는 수직꼬리 날개가 날아가 버렸고 유압 분배기가 터지면서 조종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심지어 이 비행기는 사고 직전까지 화장실 문이 잘 닫히지 않는다든지 바람이 새어든다든지 휘파람 소리가 나는 등 결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언젠가는 사고가 날 것을 암시하는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사고 그 이후

 

이후 일본 항공은 한화로 70억 원 정도를 조의금으로 지급했고 회장은 퇴임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실한 수리로 520명의 목숨을 앗아가게 한 정비 총 담당자는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녹음 파일이 공개되기 전까지 대부분의 여론은 기장에 대한 비난으로 쏟아졌고 그의 가족은 비난의 전화를 수없이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수년이 지나고 녹음 파일이 공개되자 조종사들이 사고 직전까지 필사적으로 노력했다는 사실을 인정받았습니다.

사고 지점에는 희생자를 위한 추모공원이 건립되었으며 이곳에서는 아직까지도 사고기의 잔해 부품이 발견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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