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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발생

1985년 8월 12일 도쿄에서 오사카로 향하는 일본 항공 123편이 524명의 승객을 태우고 이륙했습니다.

하지만 이륙 후 1시간 만에 비행기는 추락하여 탑승 인원 524명 중 520명이 사망하고 4명이 생존합니다. 

사망자 중 한국인은 6명이었으며 단일 항공기 사고로는 최악의 사고입니다. 

더욱 더 안타까운 점은 사망자 중 대부분은 추락 이 후 정부의 늦은 대응 때문에 사망했다는 점입니다. 

 

추락 당시 비가 내리고 있어 추락한 기체가 2차 폭발을 일으키지 않았고,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이 추락 현장에 생존해 있었습니다. 당시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잔해 속에서 죽어가던 희생자들의 비명 소리가 밤새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항공기 추락 현장

하지만 구조 활동이 시작되는 다음날 9시가 되기 전 승객 상당수는 추운 밤을 견디지 못하고 저체온증으로 숨지게 된 것입니다.

 

당시 상황

이륙하고 항공기가  7,300m에 도달하였을 때 기내에서 엄청난 폭발 소리가 들립니다.

기장은 긴급 상황임을 직감하고 긴급 사태를 의미하는 스쿽 7700 발신을 시작합니다.

 

폭발 후 항공기는 완전환 조종 불능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폭발 직후 비행기가 상하로 요동치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기장은 긴급 강화를 시도하면서 회항을 요청하였습니다.

 

비행기는 좌우로 매우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기압이 낮아지자 객실에서는 자동으로 산소 마스크가 승객 좌석에 내려왔습니다. 사무장은 산소 마스크와 벨트를 착용하라는 방송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상황

이 사진은 사고 당시 한 승객이 산소 마스크가 내려온 모습을 찍은 사진인데 일본 항공 123편의 마지막 기내 모습입니다. 이 상황에서 약 17분간 상공 6,000m에서 비행을 계속하였고 이후 오른쪽으로 급선회하면서 단번에 상공 4600미터까지 하강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체는 군마현 산악지대로 향하기 시작합니다.

 

조종사들은 더 이상의 방향 조절이 불가능해지자 급기야 날개에 달린 플랙과 엔진의 출력을 조절하여 방향 전환을 시도합니다. 이 때 기장은 추락하기 직전의 상태인 스톨에 걸릴 것을 주의하라고 합니다.

산악 지역에 들어온 항공기는 더 이상 고도가 상승되지 않았고 산에 부딪힐 듯이 고도가 낮아졌습니다. 123편은 계속해서 하강하였고 급기야 대지 접근 경보 장치가 작동했습니다.

경보 장치가 울리고 9초 뒤 오른쪽 주 날개가 수목과 부딪힙니다. 속도는 시속 640km에 도달했고 수목과 접촉한 3초 뒤 비행기는 그대로 산에 충돌하고 맙니다. 기장의 마지막 말은 이젠 끝이야라는 절박한 고음 소리였습니다

 

 

사고의 원인 

 추락한 항공기는 7년 전에도 한 번 사고를 일으켰는데 오사카 공항에 착륙 도중 기수를 너무 드는 바람에 테일 스트라이크 즉 꼬리 날개가 바닥에 부딪혀 후미에 손상을 입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고 후 보강판 수리가 부실하게 이루어졌으며 느슨했던 나사는 계속된 비행에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빠져나가 버린 것이었습니다. 

사건 당시 항공기 확대사진

위의 사진의 검은색 실선은 원래 있어야 하는 꼬리날개의 형상을 그린 것입니다.

이걸 보면 알 수 있듯 수직 꼬리 날개 전체가 없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비행기의 방향을 조절하는 수직꼬리 날개가 날아가 버렸고 유압 분배기가 터지면서 조종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심지어 이 비행기는 사고 직전까지 화장실 문이 잘 닫히지 않는다든지 바람이 새어든다든지 휘파람 소리가 나는 등 결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언젠가는 사고가 날 것을 암시하는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사고 그 이후

 

이후 일본 항공은 한화로 70억 원 정도를 조의금으로 지급했고 회장은 퇴임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실한 수리로 520명의 목숨을 앗아가게 한 정비 총 담당자는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녹음 파일이 공개되기 전까지 대부분의 여론은 기장에 대한 비난으로 쏟아졌고 그의 가족은 비난의 전화를 수없이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수년이 지나고 녹음 파일이 공개되자 조종사들이 사고 직전까지 필사적으로 노력했다는 사실을 인정받았습니다.

사고 지점에는 희생자를 위한 추모공원이 건립되었으며 이곳에서는 아직까지도 사고기의 잔해 부품이 발견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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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다머의 유년시절 

 

제프리 다머는 1960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제프리 다머의 어머니는 몸이 약하고 세균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그래서 갓난아기였던 제프리 다머를 사회로부터 철저히 격리시키고 본인 또한 기저귀를 갈 때 말고는 접촉하지 않았다. 

또한 아버지 또한 학업에 열중하느라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제프리 다머의 유년시절은 애정 결핍 그 자체이며 이러한 가정환경으로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제프리 다머의 취미

 당시 어머니와 아버지는 매일 같이 싸웠기 때문에 집 안에 있기를 싫어했다. 도피의 장소로 근처의 숲으로 도망 쳤는데

그러던 중 죽은 동물을 발견하게 되고 죽은 동물을 해부하는 취미가 생겼다. 

그리고 아버지를 통해 동물의 뼈를 보존하는 방법도 배웠는데 이를 통해 자신이 해부한 죽은 동물을 통해 표본을 만들기 시작했다. 

 

 

첫 번째 범행

 

 제프리 다머는 게이였는데 사춘기에 접어들자 남성과 성관계를 맺고 싶어졌다.

평소 해부를 즐겨했던 그는 살아있는 남성이 아니라 죽은 사람과 관계가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집 근처에서 조깅을 하던 남성을 목표로 삼은 뒤 수풀로 들어가 그를 죽이기 위해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나타나지 않아 첫 번째 살인 계획이 실패로 끝났다고 한다. 

 

 그 후 첫번째 범행은 1977년 부모님의 이혼 후 이루어졌다. 이후로 아버지는 집을 나가 모텔에서 거주하기 시작했고 동생과 어머니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 제프리 다머가 혼자 그 넓은 집에 살아가게 되었다.

 얼마 안 지나고 히치하이킹을 하던 남성에게 접근해 자신이 집까지 데려다 줄 테니 술 한 잔 하고 가라며 피해자를 자신의 집으로 유인한 뒤 아령으로 그를 살해해 시체를 해부하고는 남은 뼈를 망치로 박살내 근처 숲에 뿌렸다.

 

입대한 제프리 다머

 

 제프리 다머는 아버지의 권유로 대학에 입학을 했는데 각종 문제를 일으켜 3개월 만에 퇴학을 당했다.

이에 분노한 그의 아버지가 강제로 그를 육군에 입대시켰는데 군인이 된 후에도 매일 싸움을 일으켜 입대 2년만에 병역 부적합 판정을 받아 제대를 하게 되었다.

 그 시절 부대 인근에서 몇 번인가 살인 사건이 일어났었는데 당시 범인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훗날 이 또한 제프리 다머의 범행인 것 같다 라는 의혹이 있다. 

 

제대 이후 범행과 체포

 제대 이후 할머니의 집으로 들어가 말썽도 안 부리고 취직도 해 잠깐 평범한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자인 그는 만취한 상태로 난동을 부리고 유치장에 끌려가 벌금을 냈다.

이에 분노한 제프리의 할머니가 다머를 집 밖으로 내쫓았고 그래도 정신을 못차린 제프리 다머는 직장까지 해고당하며 백수가 되었다.

 쫓겨난 이 후 그는 아파트에서 혼자 살기 시작했다. 그 때도 살인을 멈추지 않았는데 시체를 냉장고에 넣어두었기 때문에 시체 썩은 냄새가 아파트에 퍼져 주민들과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지만 그럴 때마다 그가 냉장고가 고장 나서 음식이 상했다는 둥 핑계를 대서 그냥 넘어가 범행이 발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1년 라오스 출신의 피해자에게 접근해 사진 모델을 해주면 돈을 주겠다 라는 말로 글을 꼬셔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그 후 수면제를 타 잠을 재웠는데 잠깐 자리를 비울 때 피해자가 정신을 차리고 거리로 도망쳤다.

피를 흘리는 피해자를 본 사람들이 곧장 경찰에 신고를 해 경찰이 그를 찾아오게 되었지만 당시 제프리 다머가 경찰에게 그는 내 남자친구이고 술을 많이 마셨다. 술에 취해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해 그의 말을 믿은 경찰들이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아 제프리는 체포되지 않았다.  제프리 다머는 이 사건으로부터 2개월이 흐른 뒤에야 검거되었다.

 

살인자의 최후 

제프리 다머는 감옥에서 살해당했다.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자 평소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며 선처를 호소했지만

너무나 엽기적인 범행을 저질러서 재판부에서 선처 없이 937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이후 감방에서 기독교를 접해 매우 모범적인 생활을 보내고 있던 중 정신병을 앓고 있던 동료 제소자에 의해 철근에 후두부를 맞고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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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불탈 수 있을까?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사람의 신체를 태우기 위해서는 사람의 구성요소에 물이 너무 많다. 게다가 지방과 메탄가스는 턱없이 부족하기에 자연적으로 불타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로 시체 하나를 화장하려면 어마어마한 열과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불가능한 현실이 실제로 존재하고 그 사례도 다수 존재하기에 이를 인체 자연발화현상 또는 자연연소현상이라고 이름까지 붙혀졌다.

 

자연발화현상 사례들

1.춤추다 죽은 소녀

1950년대 런던의 한 바에서 남자친구와 춤을 추던 19세의 소녀가 갑자기 불을 내뿜으며 타기 시작했다. 주변의 사람들은 손도 써보지 못하고 소녀는 타 죽었다.

당시 주변에는 담배를 피우던 사람도 없었고 촛불 등 탈만한 물질도 없었다고 한다. 남자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갑자기 여자친구의 몸에서 불이 튀었다고 하는데 아무런 증거가 없어 원인 모를 화재로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2. 의자에서 휴식을 취하다 불 탄 노인

1951년 미국 플로리다에 사는 77세 메리 리저 부인은 안락의자에 몸을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장면은 팬시 카펜터라는 집주인이 저녁 인사를 하며 잠깐 보았다. 그 다음날 아침 집주인은 연기 냄새때문에 잠을 깼다고한다.

당시 리저 부인 사망 뉴스

냄새가 리저 부인쪽에서 나서 확인하려고 문을 열려고 했는데 문의 손잡이가 너무 뜨거워서 놀랐다. 건너편에서 작업을 하던 두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 중 한사람이 손잡이에 천을 감싸고 돌렸다. 문이 열리자 뜨거운 열기가 방안에 가득 차 있었고 의자 위에는 두개골만이 놓여있었다. 부인의 슬리퍼 안에는 발 끝이 남아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싹 타 버렸다고 한다.

 

3. 오두막에 타버린 시체

17세기 영국 어느 오두막에서 한 노파의 타 죽은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분명히 시체는 타있는데 노파가 누워있던 침대시트 또는 그 근처에 그을린 흔적조차 없었다고한다 .

 

그 밖의 자연발화 사건들

자연발화현상의 원인

 

가설 1. 알코올 중독에 의한 발화

19세기 까지는 이것이 직접적인 원인이라 인정되었다. 하지만 알코올은 주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탈 수가 없고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의 사례가 있었기에 신빙성을 가지지 못했다.

 

가설 2. 고전압 발생

특정 조건이 만족하면 신체가 자연적으로 고전압이 발생하여 신체를 태울 수 있다는 주장이다.

겨울철 건조한 날 카펫 위에 걷기만 해도 누구나에게 수천 볼트의 정전부하가 생긴다고 한다. 자동차의 문이나 쇠붙이 표면에 손을 대면 따끔한 감촉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이론도 체내에서 불꽃이 솟아오르는 것은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가설 3. 구전현상(Ball Lightening)

구전 현상이란 천둥 번개가 친 후 대기 중에 떠돌아 다니는 전하덩어리로서 밝은 빛을 내며 오랜 시간 존재한다. 즉 일종의 번개라고 보면 되는데 실제로 번개를 맞아 죽은 사람들에게도 발화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다.

 

그 외에 모든 주장들도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불이 붙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어 미궁에 빠져있다.

유전적으로 불 타는 사람이 따로 있는것일까? 이것을 밝히지 못한다면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 스스로 불타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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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시작

 2006년 5월 2일 한 여중생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 중이었다. 

이때 갑자기 학교 양아치 새끼들이 말을 걸어 무시하고 갈 길을 가려고 했지만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3명의 가해자들이 그녀를 집단으로 폭행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양아치들은 이날을 기점으로 이유 없이 폭행을 가하기 시작하더니 돈까지 요구하며 돈을 주지 않을 때마다 또 폭행을 가했다.

점점 심해지는 폭행 

 폭행의 강도가 점점 심해지더니 드라마에서 유명한 장면이 고대기 고문까지 감행하였다.

당시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은 뒤 고대기로 피부를 지졌는데 이 때문에 온몸에 화상자국이 생겼다.

하지만 그걸로도 모잘랐는지 화상의 상처가 아무를때 상처 부위의 딱지를 강제로 뜯었다. 

한번은 피해자를 꼬리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구타하여 8주간의 입원 치료를 받게도 하였다.

이러한 피해가 입었음에도 피해자의 중학교는 이를 덮으려고만 했다.

그들은 피해자와 가장 친한 케이 양으로부터 피해자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 넘어져 다쳤다는 진술을 확보했다며 사건을 축소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에 분노한 피해자의 아버지가 학교를 믿을 수 없다며 경찰에 고발장을 제출했다.

 

가해자의 구속 그리고 씁쓸한 마무리

처음엔 피해자가 3명의 학생을 가해자로 지목했었지만 경찰이 조사를 해 본 결과 그들은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오히려 평소 피해자의 절친으로 알려져 있던 k양의 진범으로 밝혀졌다.

 k 양이 겉으로만 피해자와 친한 척을 하며 남들이 보지 않을 때마다 그녀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했고 피해자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대기와 호핀 등으로 몸에 상처를 입히거나 심지어 야구 방망이까지 사용해가며 피해자를 때린 뒤 이후 경찰 조사가 시작되자 사실대로 말하면 죽여버린다 라며 피해자를 협박해 결국 어쩔 수 없이 피해자가 아무 관련도 없던 3명의 학생을 가해자로 지목했던 거였다.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상태에서 끊임없는 경찰 조사가 이어지며 결국 k 양의 자백을 받아내어 결국 구속으로 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재판부에서 이를 형사 사건이 아닌 소년보호 사건으로 판단해 보호관찰 처분만 받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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